“난 청개구리형, 남들 안하는 것 하며 보람 느껴”
안호상, 홍익대학교 공연예술대학원장
30여년 공연기획·경영, ‘조용필 데뷔50년 추진위원장’ 맡아

[중소기업투데이 이화순 기자]  안호상 홍익대학교 공연예술대학원장(60·사진). 조용필 데뷔50년 추진위원장을 맡아 올해 강단과 공연계를 오가는 그는 국내 최고의 예술경영자겸 문화 행정가다. 국립극장장을 할 땐 고사 직전의 전통예술을 살려냈고, 예술의전당에서 공연부장·예술사업국장으로 일하던 시절에는 ‘조용필 콘서트’로 대중가수 최초의 예술의전당 공연을 기획해 대중가요와 클래식 공연의 저변을 넓혔다. 오페라를 유행 장르로 변화시켰는가 하면, 지휘자가 쓰러져 공연이 펑크날 위기를 잘 수습하는 등 천재적인 예술 경영을 해왔다. 뜨거운 열정 앞에는 불가능도 없는 것일까. 그를 만났다.

-현장에서 문화예술 경영자로서 대단한 기록들을 많이 세웠다. 강단에 서서 가르치는 소감을 듣고 싶다.

“사실 기회가 되면 한번 해보고 싶었다. 현장에서 학교 계신 분들과 토론도 하고 글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긴 했는데 기회가 빨리 왔다. 한국적인 예술 경영을 이론적으로 정립하는데 조금이라도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예술 경영을 남들처럼 제대로 공부해본 적은 없지만 현장에서 일하면서 더듬거리며 길을 개척해왔다. 외국 사례나 문헌을 참고하기도 한다. 외국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우리는 어떤 단계인지…”

-현장 경험이 많으니 그 자체가 학생들을 위한 좋은 수업 재료가 되겠다.

“한국의 현장, 한국의 관객, 예술계의 이해 관계 자체가 미국이나 유럽 등지와 다르니까 아무래도. 예술의전당 말단에서 공연부장, 예술사업국장까지 23년, 서울문화재단 대표 5년, 국립극장장 5년 9개월을 하면서 쌓아온 것이 수업재료가 되는 셈이다. 공연 기획, 제작, 예술 경영, 극장 경영 등을 가르친다. 예술 현장의  메가트랜드와 마이크로트랜드를 가지고 공연 기획·경영하는 분들에게 현장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사례별로 가르친다. 연극 무용 클래식음악 전통음악 창극 등 한국 공연예술 전반과 기획·프리젠테이션·예술가와 관객의 관계, 해외 예술가들과의 관계, 위기 상황 극복 등 다양한 내용이다.”

-본인이 체험한 공연예술 현장에서의 가장 핫한 이슈로 어떤 것을 꼽겠나.

“국립극장의 전통 예술이 거의 고사 직전이었는데 살려낸 것과 2001년 런던필을 이끌고 내한한 쿠르트마주어(1927-2015. 당시 74세)가 사라 장과의 두 번째 협연을 앞두고 병원에 실려가 공연 펑크날 위기를 막아낸 것, 최초의 대중가수의 예술의전당 공연 기획 등을 들 수 있다. 이중 쿠르트마주어의 와병으로 일본 전국 도시 투어를 런던필과 함께 하던 지휘자 유리 테미르카노프(당시 63세)를 원래 잡혔던 공연 당일 무대에 세웠다. 유리 테미르카노프가 막 후쿠오카에서 삿포로로 공연을 가는 도중에 단 하루 일정이 비는데 그날이 마침 사라 장과의 두 번째 현연일이었다. 결국 일본 재팬아트측과 그날 밤 자정에 통화 후 승낙을 받았다. 2시간 후 일본 호텔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 유리 테미르카노프의 승낙을 받고 레퍼터리를 정하니 새벽 4시 30분경. 러시아인인 지휘자 유리 테미르카노프의 한국 비자를 해결해야 하는데 당시 2001년이라 비자 발급이 쉽지 않았다. 후쿠오카 총영사를 급히 찾아서 사정 이야기를 하고 새벽에 지휘자의 비자를 받아 오전 9시30분 비행기로 서울에 도착하도록 했다. 이후 낮12시에 강남 M호텔에서 지휘자복과 신발을 준비하고 입혀 예술의전당에 도착해 오후 2시부터 리허설 시작, 5시간 30분 후 사라장과의 협연을 성사시켰다. 물론 바로 일본 비자를 만들어서 다음날 아침 일본 삿포로 공연에 차질이 없도록 했다. 지금 생각해도 많은 분들에게 감사하다.”

-국립극장장 시절에 관객을 개발해 전통 문화를 살려낸 것도 유명한데.

“국립극장에 가보니 자체 공연이 봄 가을 2회 공연이 전부였고 객석도 썰렁했다. 대관이 대부분이었다. 레퍼터리 개발과 관객 개발이 시급했다. 국립 단체의 국내 내로라하는 최고 인재들이 썩고 있었다. 국립창극단 국립무용단 국립관현악단, 이 3개 단체에 연간 7~10개 작품을 새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반대도 극심했다. 사표 낸 분 빼고 남은 단원들과 신입단원들과 함께 밤 10시까지 연습에 매진했다. 창극 ‘장화홍련전’이 그렇게 매진됐고, 이후 ‘배비장전’도 성공이었다.”

-패션디자이너 정구호, 싱가포르 연출가와의 협업이 돋보였다.

“콜라보레이션을 다양하게 했다. 창극 연출은 외국 연출가에게 맡기고, 패션디자이너 정구호에게 국립무용단 연출을 맡겼다. 정구호 연출의 ‘향연’은 궁중정재부터 종교제례, 민속무용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춤 12종을 새롭게 엮어 한국 춤을 총 망라한 것이다. 국립무용단의 인기 레퍼터리가 그렇게 탄생했다. 싱가포르 연출가가 맡은 창극단의 ‘트로이의 여인들’은 2017년 싱가포르 공연 당시 3일간 전석 매진에 1500명 관객이 다녀갔다. 국립극장장 재직시 30개 정도 신작을 만들어서 그중 12개는 고정 레퍼터리가 됐다.”

-어떻게 썰렁한 극장에 새로운 관객을 몰고 왔는지 궁금하다.

“전통 공연에 젊은 세대들을 불러모으기로 전략을 짰다. 기성 세대들은 전통에 대한 편견이 있어 설득이 더 쉽지 않다고 판단했다. 전통을 모르는 젊은 세대이 우리 고유의 전통을 ‘월드뮤직’ ‘새로운 현대 예술’로 받아들이도록 소개했다. DM, 맨투맨, 광고, 매체, 전광판, 젊은이들이 갈만한 장소나 행사장·음식점 등을 면밀히 검토하고 노출하고 홍보했다. 타켓 집단이 반응하도록 만든 다음에 새로운 관객이 몰려오도록 하니까 그 현상을 보고 언론도 큰 관심을 보였다.”

-2011년에 연간 12편의 국립극장 전속단체 공연 편수가 2015~2016년에 23편으로 늘었고, 관람객수도 연간 4만명에서 7만3000명으로 늘어났다. 본인의 어떤 면이 이런 개혁과 변화를 갖고 온다고 보나.

“어릴 때부터 ‘청개구리’였다. 남들이 선호하는 편한 길 보다는 험난해도 내가 만들어가는 길을 가는 게 신명났다. 예술의전당도 처음 입사했을 때는 황무지 같았고, 국립극장도 개선점이 많았다. 또 국립은 ‘국립’이니까 이름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목표 설정을 해야 했고, 또 소명의식으로 아티스트나 스탭들을 설득하고 또 설득한다.”

-1999년 예술의전당서 ‘조용필 콘서트’를 개최했을 때 어려움이 많았던 걸로 안다.

“지금에야 예술의전당에 클래식 외의 공연도 많지만 1999년 당시만 해도 벽이 높았다. 1999년 당시 예술의전당에 첫 대중가수 공연으로 ‘조용필콘서트’를 개최했다. 대중이 좋아하는 만큼 ‘공연 내용을 고급스럽게 해서 의미를 확장한다면 폄하하고 배척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조용필씨도 처음에 내켜하지 않았다. 괜히 예술의전당 공연 고집했다가 듣기 싫은 소리 들을까봐 꺼렸다. “그냥 콘서트가 아니라 좀더 극화된 뮤지컬화된 콘서트를 하자”고 그를 설득했다.”

안 원장은 또 말러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러리안’이란 용어가 유행하게 된 데도 한몫했다. 1999년에 임헌정 부천필 지휘자를 만나서 그가 다른 곳에서 다 퇴짜맞고는 안 원장에게 “말러 하자”고 간절하게 매달리는 데 너무 절박해보여 거절을 못하겠단다. 게다가 정규 단원이 60-70명도 안되는 오케스트라가 100명 이상은 연주해야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오는 난이도 높은 말러 교향곡 전곡 완주 도전에 다들 손사레를 쳤다. 처음엔 공연장이 텅텅 비었다. 하지만 2003년엔 전석매진을 기록하고 신화를 썼다. 그 뒤엔 안 원장과 팀원들의 남다른 안목과 분석, 노력이 들어갔다. “말러 관객은 다르다. 혼자 일찍 공연장에 와서 팜플렛을 모두 사서 정독한다”는 직원들의 말에 ‘말러 토크’ 등 부대사업을 다양하게 했다.

“남들이 안하는 거, 새로운 거 해야 직성이 풀린다”는 안 원장은 그 힘을 모아 후학을 가르치고 있다. 올해는 조용필 데뷔50년 콘서트, 데뷔50년 기념 메달 만들기 등 계속 새로운 일을 벌인다. 그의 청개구리 정신이 언제까지 발휘될지 궁금하다. 안호상 원장은 2011년 제43회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문화일반부분 대통령상, 2013년 안전행정부 장관 표창, 2016년 제9회 공연예술경영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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