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태환 논설위원.
하태환 논설위원.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원자력 발전소 문제를 둘러싸고 또 한 번의 과학적 진보를 이루기 위한 논쟁이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다.

주로 환경론자들을 중심으로 한 친환경 에너지 예찬론자들은 원전의 위험성을 광고하면서 탈원전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역으로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은 원전이야말로 가장 깨끗하고 값싼 에너지원으로서 원전 없는 인류의 미래는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팽팽하게 맞선 양 진영의 주장을 놓고 급기야 정부는 공론화 위원회까지 열어 일반 국민의 여론에 따라 결정하게 하였다. 그렇다면 원전의 과학적 진실은 없는 것인가?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문제에 대해 어떻게 두 진영에서 이렇게 극명하게 반대의 진실을 주장할 수 있을까? 일면 객관적인 과학적 진실을 가지고 여러 이해 당사자들의 의견이 대립할 때, 현대 과학 사가들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현상을 도출하였다.

즉 그들은 어떤 과학적 진실 자체의 증명보다는 각각의 주장자들을 지탱해주고 있는 문화적이거나 사회적인 밑바탕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어떤 학자나 과학자도 전적으로 옳거나 틀린 것이 아니라, 판단의 근거가 각 사회와 시대 속에 뿌리 내리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즉 과학은 자명한 진리라기보다는 한 시대와 그 시대의 실천 속에 뿌리 내리고 있는 인간의 활동이다.

그런데 과학적 진실의 사회적 상대성은 그 결정권자를 정함에 있어 해결하기 어려운 갈등의 요소를 품고 있다. 과학과 기술의 문제가 정치의 문제로 이전되고, 그와 함께 직접민주주의와 다수결의 원칙을 통한 여론 조작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비근한 예로 현대 산업사회에서는 국가적 대형 프로젝트가 기획될 때마다 지역 이기주의와 님비 현상을 부르거나, 격심한 여론 분열의 대상이 되곤 하였다. 본시 기술적이고 과학적인 프로젝트는 여론의 대상이 아니라, 기술자들과 과학자들의, 그리고 전문가들의 오랜 고심의 결과여야 한다.

그런데 어떤 프로젝트를 여론의 대상으로 삼는 순간, 정치적인 문제로 성격이 바뀌어 폭력이나 강제성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는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사회적 투쟁의 장으로 돌변해버린다. 세월이 지나고 나서 보면 당연한 일이었고, 전혀 정치적 문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론이 충돌할 때에는 온 나라를 뒤흔드는 국가적 사건이 되어버린다. 가장 재미있는 예가 경부고속도로나 호남고속도로를 개발하려고 할 때, 사람들은 지방의 경제를 서울로 예속하기 위한 못된 자본의 횡포라고 극심한 반대를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지방마다 오히려 더 많은 고속도로나 철도를 뚫어주고 공항을 건설해 달라고 아우성이다. 실제 일반 국민을 참여시키는 공론의 장이라는 것은 결정권자들의 책임회피용이 아니라면, 해서는 안되는 여론 조작 작업이다. 어떻게 일반인이 전문가나 기술자에 버금가는 지식을 짧은 시간에 갖출 수 있을 것이며, 그만한 정보를 접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여론이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도록 정확한 정보를 제공할 가능성이나 의지가 있는지도 의문스럽다.

지금도 일반 국민의 무지의 소치에서 벌어지고 있는 집단행동이나 집단 이기주의로 인해 국가의 기능이 얼마나 마비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아무리 간단한 일이라도 지역 민심이나 좌우 진영 논리가 개입해버리면 본질에서 벗어난 편견의 힘겨루기와, 일부 조작자들의 보상을 바라는 음흉한 흉계만 남는다.

국가적 관점에서 여론이 부딪칠 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즉 사실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토론과 여론 형성은 오직 사실 자체들로만 국한해야 한다.

예를 들어 탈원전의 문제라면, 원전의 안전성과 상대적 비용, 그리고 그것을 감당해낼 수 있는 과학과 기술적 지식의 유무로만 한계 지우면 된다. 그리고 자유로운 토론은 전문가들에게 맡겨야 한다. 그 선을 넘어서면 자칫 그릇된 정보 조작과 여론의 호도에 불과해진다. 속지 않으려면 국민은 깨어 있어야 하고, 그러한 국민에게 진실을 알리는 것이 애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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