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섭 가족기업학회장
서울벤처대학원대학교 융합산업학과 교수

윤병섭 가족기업학회장
윤병섭 가족기업학회장

이 시리즈를 쓰는 목적은 소상공인이 지니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힘을 보태기 위함이다. 일본 3대 상인은 오미(近江) 상인, 이세(伊勢) 상인, 오사카(大阪) 상인이며 그 중 오미(近江) 상인을 다뤘다. 오미 상인은 1600년대 초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에도(江戶, 지금의 도쿄)를 본거지로 쇼군(將軍)의 통치 기구인 막부(幕府)와 다이묘(大名)의 영지인 번을 합쳐 부른 무사계급 지배기구인 막번체제(幕藩體制)를 창설한 이후부터 활약했다. 황실 중심의 왕정복고를 통한 중앙 통일 권력의 확립에 이르는 광범위한 변혁 과정을 총칭하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시대에 접어들 때까지 260여 년 동안 흔들림 없이 상업에 몰두했다. 현재의 시가현(滋賀県), 즉 오미를 근거지로 도쿄(東京), 교토(京都), 오사카(大阪), 홋카이도(北海道) 등 일본 각지에 마포, 모기장, 칠기, 삼베, 포목, 무명 등 지역 특산품을 행상으로 판매하면서 수 대에 걸쳐 전통을 만들고, 잇고 정신을 꾸준히 계승하는 공을 들여 상도(商道)를 확립했다. 우리나라 소상공인이 일본 오미 상인으로부터 시사점과 지혜를 얻어 소상공인의 꿈을 펼치는 기회가 되길 소망한다. 

행상에 나선 오미상인 모습.
나무봉 양쪽에 물건을 매단 '천칭봉'을 어깨에 메고 행상에 나선 오미상인 모습. [起業tv編集部]

일본의 상인은 사농공상(士農工商) 신분제도의 최하위 계급이었다. 17세기 후반 겐로쿠(元祿) 시대에 이르러 길을 닦고 운하를 만들어 교통이 발달했고 도시를 형성했다. 도시형성으로 상업이 번성하고 화폐 통용, 유통업, 금융업이 발전했다.

화폐 주조권을 장악한 막부(幕府)의 쇼군이 은행업무에 금, 은, 동을 환전하는 거래를 병행하거나 환전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 화폐경제의 시작은 상인에게 막대한 부(富)의 축적 기회를 줬다. 상인이 무사를 제치고 사회적 중심으로 부상했다. 오미 상인도 그랬다. 환전상은 양체칭(兩替秤)을 사용했다. 양체칭은 금이나 은의 무게를 달 수 있는 저울이다. 오미 상인은 자신의 가게에서 모기장, 칠기 밥그릇, 약 등을 팔기도 했으나 대체로 전당포 혹은 금융대부업, 환전상 등을 겸업했다. 금 또는 은을 가지고 돈을 빌리러 오는 사람들을 위해 금 또는 은의 무게를 측정하는 양체칭을 늘 곁에 뒀다.

오미 행상들은 1615년 일본의 경제수도였던 에도(江戶)의 한복판인 니혼바시(日本橋)에 첫 지점을 낸 이래 오사카의 번화가인 혼마치(本町通)와 교토의 중심인 무로마치(室町) 등 일본의 3대 도시에 모두 지점을 냈다. 거기서 그들은 금융업, 양조업, 유업(油業), 주물업, 전당포 등으로 진출했다.

막강한 상술을 바탕으로 자본을 축적한 그들은 드디어 일본의 상권을 쥐기 시작한다. 오미 상인이 상권을 쥐자 무사인 다이묘(大名)들에게 돈을 빌려줬고, 제후들도 그들과 거래를 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후손 가문인 고산케(御三家)도 그들의 돈을 빌렸고, 큰절의 주지도 그들의 고객이었다. 시골마을의 영주들도 그들의 돈을 빌려 썼다. ‘상인이 화를 내면 천하의 제후가 벌벌 떤다’는 말은 그들로부터 유래한다. 사치를 하느라 만년 적자에 시달리던 지방의 제후들은 그들로부터 돈을 빌리지 않으면 번(藩)의 유지가 안될 지경이었다.

오미 상인이 상권을 쥐기 전에는 걸어서 여러 지역을 다니며 상업에 종사했다. 16세기 중반에는 북으로는 1000km 밖의 홋카이도(北海道)부터 남으로도 1000km 밖의 규슈(九州)까지 행상을 했다. 모기장을 팔러 다닌 니시카와 덴에몬(西川伝右衛門)은 결단력과 실천력으로 아이누(アイヌ) 족이 사는 원시의 땅 홋카이도에서 사업을 벌였다. 검소와 근면으로 적은 이익만을 취해 성공한 사람이 많은 오미 상인이지만 진취적인 기상은 남다르다.

오미 상인의 필수품은 천칭봉, 나침반, 주판, 경리장부, 동전꾸러미, 동전상자, 삿갓과 조롱 등 7가지다. 오미 상인의 상징은 천칭봉(天秤棒)이다. 천칭봉을 어깨에 메고 옷감 행상을 시작해 차츰 상품을 늘려나갔다. 지역에 상권을 정착시키면 지점을 뒀다. 일본 각지에 지점을 두고 마포, 모기장, 칠기, 삼베, 포목, 무명 등 지역 특산품을 먼저 보낸다. 그런 다음 현지에 가서 천칭봉(天秤棒)을 어깨에 메고 양쪽에 포목이나 베, 옷감, 모기장, 다다미, 등, 부채, 도기, 칠기그릇, 환약, 담뱃대, 차(茶), 삿갓 등을 매달아 다니며 판다. 일본 각지는 토호쿠(東北), 간토(関東), 도쿄, 교토, 오사카, 홋카이도 등이다.

회자되는 천냥천칭(千兩天秤)은 나무 막대기인 천칭 하나만 있으면 천냥의 돈을 벌 수 있다는 뜻이다. 북쪽 홋카이도로부터 최남단 규슈(九州)에 이르기까지 방방곡곡 천칭봉을 어깨에 메고 행상을 나서 돈을 번 후 교토, 오사카, 에도 등에 큰 상점을 개업해 성공을 거두었다. 무서운 상혼(商魂)을 읽을 수 있다. 혁신적인 상법에 불굴의 정신을 가지고 있으나 손님을 대할 때는 늘 웃는 얼굴이다. 오미 상인은 전국을 다녔기 때문에 지역별로 물건 가격을 소상히 파악할 수 있었고, 그 정보를 이용해 박리다매의 상술을 발휘했다.

둘째, 나침반이다. 항상 북쪽을 가리키는 나침반은 방향에 대한 가장 오래된 도구 중 하나다. 오미 상인은 멀리 행상을 떠날 때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나침반을 지니고 다녔다.

셋째, 주판이다. 주판을 늘 책상 위에 놓고 돈 계산을 하지만 멀리 행상을 떠날 때도 돈 계산에 주판을 사용했다.

복식부기를 최초로 사용한 오미상인의 장부.[네이버 블로그 HONDAYAMA]

넷째, 대복장이라는 경리장부다. 경리장부는 물건을 팔고 사는 기록장일 뿐 아니라 자신의 경영상태를 한눈에 파악 할 수 있도록 복식부기를 사용했다. 1700년대 호상으로 활약한 히노(日野) 마을의 나가이(中井) 가문이 일본 최초로 1600년대부터 복식부기를 썼다는 기록이 1953년 밝혀졌다. 시가(滋賀)대학 사료관에는 붓글씨로 내려쓴 손익계산서와 재무상태표 등 이익을 계산하는 완전한 형태의 복식부기가 기록돼 있다.

다섯째, 동전꾸러미다. 동전 묶음을 사용하기 편리하도록 96개의 동전을 한 줄로 묶어 꾸러미로 만들어 놓았다.

여섯째, 동전통이다. 가게 주인은 돈을 담기 위한 나무로 만든 동전통을 가지고 있었고, 때로는 돈을 지키기 위해 동전통을 베고 잤다.

일곱째, 삿갓과 조롱이다. 언제 어디로 행상을 나가게 될지 모르므로 늘 그들 곁에는 뜨거운 햇볕을 가릴 수 있는 삿갓과 비옷이 있었다. 

오미 상인이 행상을 나갈 때 복장을 보면 우선 천칭봉을 멘다. 그리고 의류 등을 담는 버들나무나 대나무로 짠 용기(行李)를 천칭봉 양 끝에 단다. 복장은 행상에 빈틈없이 준비한다. 우천용으로 끌어당기는 망토(引き廻し, 道中合羽)를 걸치고, 손등을 덮을 수 있는 삼베와 무명천으로 만든 장갑(手甲), 정강이에 끈으로 묶고 걷기 편하도록 단단히 묶는 각반(脚絆), 풀 등 짚으로 만든 끈을 발에 휘감아 신는 신발(草鞋), 통이 좁은 남자용 바지(股引), 잔돈을 넣고 꺼내는 주머니(早道小錢入れ), 두꺼운 무명 직물 허리띠(小倉帶), 먹통에 붓통이 달린 휴대용 문방구(矢立)와 잊지 않도록 기록하는 수첩(手控え帳), 담배를 넣고 꺼내는 주머니(煙草入れ), 여름용과 겨울용 무명옷(木綿), 삼나무 잎으로 엮은 갓(菅笠)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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