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만 객원 편집위원(한서대 교수)

박경만 본지 편집위원
박경만 본지 편집위원

제로섬 법칙이나 죄수의 딜레마, 게임이론 등은 국제관계의 교범이다. 국가 지도자 간의 러브샷 너머로도 날카로운 암수가 오가기 마련이다. 최근 한국 외교행태가 그러하듯, 샅바싸움은 커녕 타국이 ‘학수 고대하는 해법’에 말려드는 건 금물이다. 그게 외교의 정석이다.

전기차와 반도체를 둘러싼 한·미 간 ‘갈등’의 서사도 마찬가지다. 국제정치 원론에 충실할 때만 그 해법이 나온다. 우리로선 미국의 처사가 서운하고 괘씸하지만, 그들은 게임이론에 충실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에 버금가는, 차가운 육도삼략의 비법과 전술을 구사해야 한다. 지금의 한국정부가 그럴 자질이나 깜냥이 될 것인가는 별개 문제다. 이번 방미(訪美)길 한미정상회담에선 어떤 수를 쓰더라도 챙겨야 할 두어 가지 전리품이 있다.

우선은 반도체에 대한 차별조치를 없애거나 완화하는 것이다. 정작 미국은 겉과 속이 다르다. 얼마 전엔 상하이에 자기네 ESS 시설을 짓는다고 했고, 중국과 겉으론 싸우면서 뒤에선 온갖 상품교역을 사이좋게 늘려가고 있다. 그 와중에 배터리 강자인 중국 CATL은 미국 현지 공장을 짓겠다며 생색을 내고 있다. 상하이 테슬라 공장이나, 정조우 애플 공장이 미·중 갈등으로 문닫았다는 소린 들어본 적 없다. 오히려 “중국에 전기차 공장 더 짓겠다”며 일론 머스크는 큰 소리치고 있다. 백악관은 되레 즐기며 표정 관리하는 분위기다.

그렇다면 우린 ‘미국의 위선’을 조건삼아 흥정해야 한다. 배터리 광물만 해도, 일본은 약삭빠르게 미국으로부터 ‘열외’를 인정받았다. 우리도 중국산 광물의 유예기간을 얻어야 하고, ‘칩스법’ 보조금 신청 요건을 완화하도록 해야 한다. 중국에 대한 우리 기업의 반도체장비 수출규제도 완화해주거나, 장기간 유예라도 해달라고 분명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 필요하다면 볼륨이 좀더 큰 ‘거래’도 시도해야 한다. 미국의 이익에 기여하는 한국의 지정학적 역할을 강조하며 설득하는 것이다. ‘인·태전략’ 내지 동북아 세력균형의 밑천으로서 한국경제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것도 방법이다. 예를 들자면 그렇다는 뜻이다.

또 한 가지가 있다. 일부 국내 언론은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한껏 ‘감정’을 북돋우고 있다. 미국 ‘칩스법’에 따라 우리 기업 영업기밀까지 내줄 바엔 아예 보조금을 받지말자고 한다. 그야말로 홧김에 밥상을 엎어버리는 격이다.

그러면 한번 따져보자. 과연 보조금을 받는 조건으로 우리가 미국에 강탈당할 ‘기밀’은 어떤 것일까? 단적으로 그 ‘어떤 것’이라고 답하기 어렵다. 우리 아니면 대체 불가능한 고도의 기밀이나 기술이 과연 있나 싶다.

삼성전자의 ‘파운드리’라는 용어는 참으로 아우라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아우라와 품격은 있어보일지 몰라도, 이는 그저 험한 육체노동을 통해 반도체를 제작하는 공장일 뿐이다. 정작 ‘알맹이’가 더 크고, 실속이 있는 비메모리 분야에 비할게 아니다. 굳이 미국에 빼앗길 ‘기밀’이라면, 생산을 위한 오퍼레이션이나 그 주변의 특허 정도다. 물론 시장 전략이나 영업 노하우도 있지만, 그것 역시 대체 불가한 기업 전유물로 치부하긴 어렵다.

물론 그런 기밀을 탈취당함으로써 우리 기업의 이익이 다소간 침해될 소지는 있다. 그렇다고 우리네 반도체 산업의 기둥이 무너질 만큼 타격이 있을까. 안타깝지만 그럴만큼 고등한 원천 기술을 우린 갖고 있지않다. 고도의 주문형 반도체 설계 기술이나 설계 로드맵, 다품종 소량의 아키텍처, 장비 기술 등은 우리네 기술 창고에 없다.

그래서다. 일부 철없는 언론의 선동처럼, ‘밥상’을 엎을게 아니라, 미국 정부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NSTC(국가반도체기술센터) 활동에 반드시 끼어드는게 숙제다. 이 기구는 그냥 ‘센터’가 아니다. 세계 반도체 패권을 장악하고, 팍스 아메리카나의 영광을 추억하는 미 정부의 ‘파이널 디시전’의 현장이다.

그곳에선 상상키 어려운 첨단의 반도체 설계 기술이나 로드맵이 탄생할 것이다. 미개척지인 양자기술이나 바이오·생리학의 새로운 지평도 이곳에서 꽃필 수도 있다. ‘21세기 버전의 실리콘 밸리’가 개막된다고 해도 과언 아니다. 그런 천지개벽의 굿판에 우리도 필히 끼어들어야 한다. 그래야 수 십년, 혹은 그 이상의 한국경제의 비전을 담보할 수 있다.

미국은 고약한 나라도, 위선적인 나라도 아니다. 냉혹한 국제질서를 그저 현명하게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 못한 우리가 오히려 문제다. 국익과 맞바꿀 만한 등가물은 그 어디에도 없고, 국제관계에선 의리나 ‘정의’ 따위는 없다. 이번에야말로 치명적인 국가적 전리품을 챙기지 못할 경우, 그 후과는 상상하기 어렵다. 이번 방미길은 그래서 유사 이래 가장 비장한 여정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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