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미 칼럼니스트
고양생명의전화 상담 매니저, 심리학자

이선미 칼럼니스트
이선미 칼럼니스트

무척 인상 깊었던 영화지만,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다. 내용은 서로 사랑하는 노부부에게 ‘치매’라는 병이 찿아오면서 생기는 갈등을 심리적으로 설득력있게 그려낸 것이다. 부인이 치매에 걸린 후 일상생활을 하기 어려워 남편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이런 부인을 남편은 지극 정성으로 돌본다. 잠깐씩 기억이 돌아올 때마다 부인은 요양병원에 보내 달라고 간청한다. 더 이상 남편을 힘들게 하기 싫어서다. 결국 시간이 흐를수록 남편도 지쳐가고, 마침내 남편은 아내를 살해하고 만다.

함께 한 기억을 잃어버리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부부나 부모 자식 간의 끈이 끊기는 것이다. 인간의 숙명적 종결 지점이라고 할 ‘죽음’은 흔히 그런 비극과 함께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래서 어떻게 사느냐 못지않게, 어떻게 죽느냐 하는 문제도 중요한 것이다.

죽음은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인간의 필연적이면서도 엄숙한 최후의 존재방식이 바로 죽음이다. 그것은 논리적, 이성적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는 실존적 진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4차산업혁명은 감히 이런 ‘진리’까지 뒤엎으려 한다. 신(神)의 경지인 호모데우스 운운하며, 온갖 기술을 동원하여 죽음의 경계에 도전하는 ‘영생’까지 꿈꾸고 있다. 그 정도는 아니지만, 기술과 의술이 발달할수록 순순히 ‘죽음의 진리’에 승복하지 않으려는게 지금 우리의 많은 모습들이다.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은 이제 익숙한 생활시설이 된 지 오래다. 앞으로 누구든지 나이먹고 운신이 힘들면 예외없이 가야만 하는 곳이 된 듯하다. 그럴수록 우리 주변에서 ‘진정한 죽음’은 더 이상 보기 힘들어졌다. 요양병원이나 중환자실, 장례식장에서는 ‘죽음’ 아닌 ‘사망’만이 있을 뿐이다.

2017년 데이터에서 한국인 100명 중 76명은 병원에서 사망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반면에 또 다른 조사에 의하면 57% 이상이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길 희망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병원 중환자실에서 죽는 비율이 유난히 높은 것이 현실이다. 더욱이 의술이 발달하면서 힘든 병치레 속에 온갖 연명치료를 동원하다보니, 사망하기까지의 기간이 굉장히 길어졌다. 가까운 장래에 바이오테크나 유전공학 기술까지 가세하면, 정말로 온갖 병에 시달리면서도 100살 이상 가늘고 길게 사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혹시 아는가. 정말로 ‘영생’에 버금가는 무한 수명을 누리는 날이 올 것인지…. 더욱이 IT기술까지 앞으로 의술에 더해지면, 그 어떤 ‘첨단’의 치료 방법이 나올지 알 수 없다. 심지어는 카센터에서 자동차 부품을 갈듯이, 한 인간의 모든 피와 살과 신체부위(부품?)를 통째로 갈아끼우는 날이 올 수도 있다. 그러면 겉으론 동일한 인물이지만, 사실상 다른 부품으로 재활용된 전혀 다른 ‘재생 인간’이라고 하는게 맞다. 그러나 그것은 주변 사람들과 세상은 물론, 자기 자신에게도 비극이다. 그런 세상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여기서 소위 ‘잘 죽는 것’ 혹은 ‘좋은 죽음’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다. 흔히들 ‘웰빙’은 잘도 외치지만, 웰다잉(well-dying)에 대한 인식은 그다지 높지 않다. 즉, 품위있고 존엄하게 생을 마감하는 일에 대해서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다. 일부 의식있는 사람들에 의해 논의되고는 있지만 큰 울림이 없다. 그러면 과연 ‘좋은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

우선 고통스럽지 않은 ‘진정한 죽음’이어야 한다. 쉽게 생각하면 스스로 기력이 쇠해지고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첨단’이란 이름을 붙인, 불필요한 연명치료를 받지 않겠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는 것도 그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조금이라도 더 수명을 연장하려고 오만가지 의술과 비책을 총동원하며, ‘마루타’처럼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괴롭혀선 안 될 것이다. 더 이상은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연명치료에 연연하다 병원 중환자실에서 쓸쓸히 삶을 마감하는 비극은 멈춰야 할 것이다.

또한 주변 사람들을 힘들지 않게 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사망’ 아닌 ‘죽음’을 위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삶과 죽음 모두 인간의 존재 방식이라면, 남은 산 자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도 존재에 대한 부정행위다. 또한 중요한 것은 죽음을 준비하는 충분한 시간을 갖는 것이다. 그저 고통스런 첨단 연명치료에 연연해하느라, 주변을 정리할 시간도 없이 황망히 생을 끝막음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자신이 정리하고 책임져야 할 현실을 외면하는 것일뿐더러, 심하면 사별 가족들에게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까지 안겨주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죽음’을 몇 번씩 경험할 수는 없다. 그래서 지금과 같은 ‘죽음’의 문화가 너무나 아쉽다. 이제는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서 ‘좋은 죽음’을 위한 사회적, 제도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갓 태어난 아이 하나를 기르기 위해서는 온 마을 사람이 필요하듯, 한 개인이 삶을 마감하는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제도적 뒷받침은 물론, 전문가나 지인들, 간병인, 호스피스 등 ‘좋은 죽음’을 맞이할 시스템과, 이에 대한 사회적 공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온갖 첨단 연명치료에 매달리지 않고, 편안히 ‘자연사’를 맞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가족의 품에서 따뜻한 이별을 고하고, 남은 그들에게 자신이 누려온 삶의 의미를 온전히 넘겨주며 떠나야 할 것이다.

디지털 시대는 기술만능, 곧 테크노피아를 통해 유토피아를 추구한다. 그래서 감히 재생인간, 곧 트랜스휴먼에 도전하며 영원히 죽지 않는 세계까지 범접하려고 한다. 참으로 오만의 극치이자, 자연의 섭리에 대한 도전이다. 삶과 죽음이 한 조각으로 엮인 인간 존재의 근원을 외면하는 짓이다. ‘죽음의 진리’ 앞에서 겸손한 것. 그것이야말로 자칫 ‘인간’을 업수이 여기는 기술 만능의 세상을 분별하는 지혜가 아닐까. 물론 살아있는 동안, 선물같은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는 삶 또한 ‘좋은 죽음’을 준비하는 최선의 방법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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