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만 객원 편집위원(한서대 교수)

박경만 본지 편집위원
박경만 본지 편집위원

이럴 수도 있구나 싶다. 한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이 권력의 눈 밖에 난 바람에 해당 방송국 자체가 존폐의 위기에 몰렸다. 지방의회가 해당 방송국의 지원 예산을 아예 없애기로 한 것이다. 해당 프로그램이 ‘편파적’이란게 이유라곤 하나, 진영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는 평판 따윈 아랑곳 않는다. 그 보다 한 달 전엔 ‘날리면 or 바이든’ 시비를 이유로 특정 방송 취재진의 순방외교 전용기 탑승이 거부되기도 했다. 국가 정상의 외교 동선 취재에서 특정 언론이 배제된 것이다.

평소 영상이나 보도를 통해 눈치없이 집권 세력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뉴스전문채널도 비슷한 운명에 처했다. 그나마 객관성이 담보된 공기업 대신, 재벌 집단에게 소유권을 넘겨, 권력친화적 반경으로 편입시키는게 아니냐는 의심을 사고 있다. 하물며 작은 유튜브 수준의 보도매체는 말할 나위도 없다. 비판의 여지가 있음에도 제도권 언론의 관행이 되다시피한 ‘뻗치기’나 잠복취재가, 이들에겐 허용되지 않는다. 그런 발칙한 짓을 한 어느 작은 탐사보도 채널은 최근 주거칩입과 스토킹범으로 몰려 가차없는 ‘고통’을 맛보게 생겼다.

불과 얼마 전이었건만, 적어도 정치권력과의 관계에선 한국이 언론 선진국 대접을 받았다. 국경없는기자회가 아시아 제일의 언론자유국으로 순위를 매겼던게 불과 작년이었다. 과거에도 물론 권력과의 갈등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공직사회만큼은 불편한 언론을 최대한 인내하려는 시늉이라도 했다. 허나 이젠 그런 표정관리의 수고조차 거부하는 분위기다. 힘있는 자들일수록 조자룡이 헌칼 쓰듯 ‘법적 조치’로 을러대기 일쑤고, 우리 사회의 크고 작은 기관이나 조직의 강자들도 걸핏하면 고소, 고발로 분풀이를 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당대의 세도가나, 사회적 강자일수록 섣불리 그 부조리함을 고발했다간 곤욕을 치를 판이다. 그런 봉변을 당하지 않으려면, 문장과 토씨 하나하나 치열한 자기검열을 하고, 세치 혀를 조심하는게 현명한 처세가 되어버렸다. 

새삼 거론하기도 지겹지만, 무릇 언론이란, 권력자에게 질문을 하며 논(論)하는게 본연의 책무다. 논한다는건 맹목적 수긍보단, 이견과 비판을 재료로 한 발화의 섞임이자 대립이다. 규정된 서사만을 기록하며, 순종적 침묵을 강요하는 건 묘지에서나 가능하다. 정치권력 혹은 최고 권력자는 자신이 선호하는 관점과, 그렇지 않은 관점을 골라내고픈 자의적 욕구를 스스로 제어하고 인내해야 마땅하다. 원론적인 얘기지만, 이견을 질식시키고, 사상의 자유로운 시장을 통제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숨통을 죄는 것이다. 시쳇말로 반(反)지성적 행위다.

하긴 언론 스스로도 자초한 구석이 많다. 이른바 보수와 진보라는 교조적 진영 논리에 사로잡혀 시종 확증편향적 보도만을 고집하진 않았던가? 강자에겐 유약하고, 만만한 약자에겐 하이에나처럼 가혹행위를 하지나 않았는가?, 클릭 장사에 목을 매고, 권력에 의한 뒷탈을 걱정하며 복지부동하지는 않았던가? ‘균형보도’를 참칭하며, 옳고 그름을 희석시키지나 않았는가? 지금도 그렇다. ‘팩트’가 지닌 유기적 의미를 제대로 채굴하여 전달하는걸 피곤해하면서도, 입맛에 맞는 악마의 편집을 즐기곤 한다. 그러면서 언론 자유가 위협당하는 현실에 대해선 ‘나만 아니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오죽하면 상식적인 시민들이 ‘기레기’라고 했을까.

언론 자유의 전체집합은 ‘자유’다. 그러면 ‘자유’란 뭔가. 타의에 의해 자신이 규정당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다. 자유의 가치를 인식하는 언론인이라면, 그 숭고한 사유의 결과인 언론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헌신해야 마땅하다. 존중받아야 할 ‘개별 주체’로서 언론에 대한 권력의 규정을 과감히 거부해야 할 것이다. 그건 자유롭고 민주적인 세상의 초보적 상식이다. 안 그래도 지금 디지털 혁명의 항간(巷間)에선 세상을 미혹하는 역설이 판을 치고 있다.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식의 무지와 차별, 혐오가 담론의 옷을 입고 횡행하는 세상이다. 이질적 가치에 대한 폭력적 빠롤(Parole)이 매력적인 악화(惡貨)로 소비되고 있는 형국이다. 언론 자유의 위기, 그 행간에는 그런 반(反)공화적 기류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언론의 본딧말은 매사 토를 달며,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것이다. 그런 맥락을 사회 일반과 공유하며, 독자와 화해하는게 언론이다. 지배 권력 역시 그런 언론을 완력으로 포획하거나 진압해선 안 될 것이다. 갈등의 조정자답게 토론과 타협으로 이뤄진, 건강한 ‘언론 플레이’에 나서는 것이야말로 국민으로부터 한시적인 권한을 위임받은 자들의 의무다.

상상컨대, ‘신문없는 정부보다 정부없는 신문을 택하겠다’는 토마스 제퍼슨의 진짜 속마음은 달랐을 것이다. 사사건건 속을 썩이는 언론에 대해 치미는 울화를 감당키 어려웠을 것이다. 허나 초인적 인내로 쓰린 속을 달래며, 그런 덕담을 내뱉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게 그의 말은 희대의 명언이 되었고, 그는 200여 년 지난 지금까지 선명한 이름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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