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하태환의 인문학 칼럼

하태환 논설위원.
하태환 논설위원.

민주주의는 공짜로 주어지고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싸워서 쟁취하고 지켜야 한다. 정권 교체를 민주화 완성이라고 착각하여 나태해진 순간 민주주의는 다시 나락으로 떨어진다. 정치적 민주화가 지지부진하면, 경제적 민주화도 요원해진다. 우리 사회의 빈부 격차는 여전하고, 청년 실업률이나 전체 실업률도 개선되지 못한다. 정부가 아무리 고용 증진을 위해 과감한 재정 투자를 하고 세계 역사상 유래 없는 공짜 분배 정책을 쏟아내지만 궁핍한 현실은 조금도 나아지질 않는다. 사실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민주화는 순차적이라기보다는 함께 병진해야 할 평행선이다. 오랜 민주주의 역사를 가진 미국이나 유럽에서조차 경제적 사정이 좋지 못하면 정치적 상황도 여지없이 반동적 상태로 후퇴해버리고, 역으로 정치적 민주화 없이는 경기 부활도 모두 물거품이 되어 버리는 악순환을 되풀이 한다.

그런데 최근에는 미투라고 하는 새로운 사회적 변혁의 바람이 불면서, 이 두 후진적 민주화 상태에서 벗어날 희망을 준다. 정치나 경제적 민주화를 방해하는 장애는 훨씬 더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사회적 민주화의 후진성이다. 인종, 재산, 직업, 남녀, 신체적 장애, 연령, 신분, 종교, 학벌, 출신 지역, 국적 등의 사회적 불평등이 뿌리 깊이 박혀 있는데, 다른 것들의 피상적 진보는 아무리 현란해도 눈속임에 불과하다. 다른 민주화들은 겉으로나마 개선할 수 있고, 폭력적으로 강제할 수도 있지만, 사회적 민주주의는 오랜 관습과 편견의 산물이기에 근본적인 변혁이 너무 어렵다. 이런 힘든 변혁 운동이 우리 꼴통 사회의 약하고 침묵을 강요당한 민중인 여성들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물론 미투 운동은 미국에서 먼저 일어나 우리 사회로 전파되어 왔다. 이제 이 운동을 단순한 흉내내기가 아니라 진정 우리의 것으로 삼아 사회 전체의 민주화를 위한 기폭제로 삼는다면 대한민국은 새로운 역동성을 갖게 될 것이다. 미국이나 서구에서는 미투와 동일한 개혁의 움직임이 이미 100년도 전에 일어나고 있었음을 감안하면 그만큼 사회적 민주화의 달성이 어렵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준다.

서구에서도 사회적 분야에서의 혁명적 시도가 가장 늦게 일어난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프랑스의 인상주의 운동이 될 것인데, 여기서는 미투와 더 직접적이면서도 혼자 외롭게 싸웠던 예술가인 마르셀 뒤샹에 대해 언급해보자. 1917년도에 뒤샹은 미국의 주변적인 예술가들의 전시회인 앵데팡당전에 건축자재인 남성용 소변기를 ‘샘’이라는 제목과 함께 예술 조각처럼 의젓이 전시했다. 물론 당대에는 예술을 모독했다하여 세인들의 분노와 조롱을 받았지만 기존의 예술관을 통째로 엎어버린 뒤샹의 파격적 레디-메이드는 차후 현대 미술의 양상을 바꾼 혁명적인 의거였다. 예술 세계에서 기존 질서와 기득권에 대한 뒤샹의 문제제기는 이후 사회의 다른 모든 방면으로 확산되어 서구 사회 전체를 뒤바꿀 수 있게 해 주었다. 뒤샹의 파격은 이후에도 계속되는데, 1919년에는 파리의 길거리에서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인쇄된 싸구려 엽서를 구입해 거기에 수염을 그려 넣고, 아래에는 L.H.O.O.Q.라고 명명했다. 거기서 영어로는 look을 읽을 수 있고, 불어로는 Elle a chaud au cul(엘 라 쇼 오 퀴 = 그녀의 엉덩이는 화끈해)를 읽을 수 있다. 뒤샹은 성스럽고 아름다운 여인의 이미지 밑에서 야만적 규칙과 고정관념이 만들어 놓은 소비적 대상, 성적 욕구의 대상을 보았다. 그래서 아름답게 가공된 여인의 이미지 밑에 음흉하게 숨어서 세상의 질서를 주무르는 추잡한 남성적 이미지를 백일하에 드러낸 것이다. 혁명은 그래야 한다. 관습과 고정관념에 젖어 부조리한 규범과 규율을 방관하고 공모하며 안주하는 비겁함과 나태함을 폭로하고, 나아가 그런 부조리를 깨뜨림으로써 억눌린 인간성과 자유를 찾는 것이 진정한 혁신이고 진보이다. 창조와 혁신은 우리가 무심히 받아들이고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문화적 타부와 규제, 맹목적 신봉의 대상인 우상을 파괴할 때 달성된다. 기독교의 ‘내 앞에 우상을 두지 마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저작권자 © 중소기업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