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태환의 인문학 칼럼

인문학적 훈련이 되어 있지 못한

사람들은 사물이나 현상의

이면을 보지 못하고,

합리적인 분석을 하지 못하며,

즉각적인 감정과 편견에

사로잡혀 완고하고 편협하다.

 

하태환 논설위원
하태환 논설위원

우리는 종종 인문 과학 또는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을 종종 듣곤 한다. 그래서 인문 과학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았다.

1 . 정치, 경제, 사회, 역사, 문예, 언어 따위를 자연 과학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 좁은 뜻으로는 역사, 문예, 언어 따위를 사회 과학에 상대하여 이른다.

2 . 인간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학문을 통틀어 이르는 말.

위의 정의를 통해서 본다면 인문학의 위기란 우리 인간의 활동 전체를 통괄하는 어떤 상위적인 영역에서 이상이 발생하였고, 그 이상적 징후가 우리의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돌출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인문학의 퇴조란 결국 인간성의 위기나 상실, 그리고 그에 따른 창조성과 모험심의 상실, 그리고 인간의 주관성의 상실을 이를 것이다. 그리고 각각의 개인은 자율성과 자유를 반납한 대신에 기계적 시스템과 타성에 갇혀 물신을 숭배하고 소외된, 소비하는 기계 부품에 불과하게 된다.

이러한 인간과 사회의 모습은 20세기 초부터 발터 벤야민이나 귄터 안더스 등이 예견한 기술 시대의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런 비극적 결과는 기술이 이데올로기에 봉사하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원동력임을 생각하면 자본주의 사회건, 사회주의 사회건, 혹은 나치나 파시스트 체제건, 기술의 지배를 받는 모든 사회에 공통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이다.

기술에게 중요한 것은 효용성과 결과이기 때문에, 인간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전락하며, 필연적으로 인간성의 파멸을 동반한다. 인간이 기술의 주인이 아니라 기술이 인간을 지배하는 냉혹한 기술 시대에, 좀 더 따뜻하고 민주적인 기술과 그 사용은 없을 것인가? 기술시대에 상실된 인간성, 그를 초래한 차가운 기술 시스템, 그 속에 감옥처럼 갇힌 인간과 그 인간의 불행, 그리고 그로부터의 탈피를 추구하는 것이 어쩌면 현대의 인문학과 예술이 당면하고 하고 있는 과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많은 인문학자들은 가치 판단이나 주관성을 상실한 인간이 그 판단력을 회복하기를 바란다.

프랑스의 현대 석학 중 한 사람인 피에르 부르디외의 다음 비평은 기계화한 인간의 상태를 잘 설명한다. “그 복잡한 가운데서 진실이 무엇인가를 꼼꼼히 분석하기보다는, 어떤 생각이나 가치, 사람, 제도 또는 상황에 대해 무턱대고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기가 무한히 더 쉽다.” 인문학적 훈련이 되어 있지 못한 사람들은 사물이나 현상의 이면을 보지 못하고, 합리적인 분석을 하지 못하며, 즉각적인 감정과 편견에 사로잡혀 완고하고 편협하다.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자신이 싫어하는 것에 대해서는 냉정히 눈과 귀를 닫아버리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신념과 편견이 흔들리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그들은 평생 좁은 동굴 속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오직 그 세계만이 아늑함을 주고, 진실의 보증자이다. 그들은 동굴의 우상에 기꺼이 자신을 바친다. 불행하게도 이것이 현재 우리가 처한 대한민국의 적나라한 모습이 아닐까? 정당과 정치인들은 오직 자신의 주장과 관점만을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학자들은 이미 밝혀진 안전한, 죽어버린 사실의 암기와 나열에 주력하며, 창조와 혁신을 먹고 살아야 하는 사업가들은 낡은 제도의 규제 틀 안에 갇혀 숨쉬기조차 힘들어 한다. 예술가들조차 낡은 틀을 깨뜨릴 줄 모르고, 오히려 자신을 보호해줄 기득권의 품 안으로 몸과 영혼을 다 바쳐 도피한다.

그렇다면 이미 죽어버린 것 같은 우리의 인문학에 소생 가능성이 있을까? 냉정히 말하자면 이것이 현재의 우리의 인문학에 던져야 할 질문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미래가 약간의 가능성이라도 있을까 질문하는 것과 같다. 고발하건데 지금의 무기력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회복이나 부활의 기미는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책임 있는 누구 한사람, 어느 세력이건 자신의 기득권을 내던지고 과감한 혁신의 길을 걸으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시나브로 무기력하고 달콤한 죽음의 향연에 너무 오래 취해 있었나 보다. 부패하고 썩은 부위는 도려내야 하지만, 그 증상이 너무 심하면 차라리 방치하거나 심화시켜버리는 것이 더 낫다. 그래야 한용운이 예견하듯,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고, 이육사가 그 까마득하던 과거에 들었듯이, 백마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광야에서 목놓아 소리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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