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대 세계한인무역협회 회장, 2년 임기
상임이사 전체 333표 중 214표 얻어
90년대 일본 건너가 3천억대 매출 일군 '뉴커머' 사업가
세계한인경제인대회 마지막날 이사회에서 선출

장영식 일본 에이산 대표가 제21대 세계한인무역협회 회장으로 선출됐다.
 장영식 일본 에이산 대표가 제21대 세계한인무역협회 회장으로 선출됐다. 사진은 14일 서울 그랜드워커힐호텔 비스타홀에서 열린 이사회장에서 투표에 앞서 장영식 후보가 정견발표를 하는 모습. 

[중소기업투데이 황복희 기자] 제21대 세계한인무역협회(월드옥타) 회장에 장영식(53·일본 에이산 대표) 후보가 당선됐다. 월드옥타 40년 역사에서 최연소 회장이다.

장 신임 회장은 14일 서울 광진구 그랜드워커힐호텔에서 열린 이사회에서 전체 상임이사 333표 중 214표를 얻어 함께 출마한 김현태 후보(일본 베니키아칼튼호텔 대표)를 98표차로 누르고 차기 회장에 올랐다. 선거는 온·오프라인 투표로 진행됐다.

장 신임 회장은 “‘눈부신 도약을 위한 옥타버스 운전기사 장영식’을 슬로건으로 한 공약을 이루기 위해 머리를 모으고 함께 하나가 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올해 창립 40주년을 맞은 세계한인무역협회(이하 월드옥타)는 ‘제25차 세계한인경제인대회’ 마지막날인 이날 오후 이사회를 열고 이같이 차기 회장을 선출했다.

장 신임 회장은 1993년 25세 나이에 맨손으로 일본에 건너가 면세점 사업을 통해 연간 3000억원대의 매출을 올리는 등 뉴커머 중 가장 성공한 사업가로 꼽힌다. 그는 지난해 발발한 코로나로 면세점 사업에 직격탄을 맞았으나 특유의 돌파력과 순발력으로 코로나 이전 매출을 회복했다. 기존의 면세점을 한국식품 매장으로 탈바꿈시켜 굴지의 백화점에서 러브콜을 하는 등 성공신화를 쓰고 있다.

월드옥타 회장 선거 등록을 앞둔 지난 8월말 인터뷰에서 장 신임 회장은 핵심공약으로 월드옥타 ‘지회의 역량강화’를 꼽았다. 이를 위해 본부의 권한을 지회에 대폭 넘기겠다는 말이다. 그는 특히 월드옥타의 정체성을 담보하는 글로벌마케터를 선정하는 권한을 지회가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 신임 회장은 2003년 월드옥타와 인연을 맺은 뒤 지금까지 18년간 월드옥타의 성장사와 궤를 같이해 왔다. 실제로 월드옥타는 1981년 설립이 됐지만 한국 사회에 존재감을 드러낸 것은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다. 그는 월드옥타 도쿄 지회장과 이사장, 상임이사 및 상임집행위원, 수석 부회장 등을 두루 거치면서 전 세계 각 지회들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지회장들의 애로가 무엇이며 어디가 가려운지를 가장 잘 안다고 자신했다. 특히 월드옥타 도쿄지회장을 지내며 도쿄지회의 르네상스를 열었다고 자부한다. 도쿄 옥타 차세대 1기부터 16기까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며 차세대들을 통상위원회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등 수출역군으로서의 역량을 키워내는데 주력해왔다고 강조했다. 수석부회장 당시에는 전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차세대를 상대로 강의를 하는 등 애정을 쏟았다. 최근에는 일본 상공회의소 회장으로 5년간 봉사를 해오다 지난 6월말 퇴임했다.

1981년 모국의 경제발전과 수출촉진을 위해 설립된 월드옥타는 현재 전 세계 64개국에 138개 지회를 둔 명실상부한 한민족 대표 경제단체로 성장했다. 정회원 7000여명과 차세대 2만1000여명 등으로 구성된 회원들은 지구촌 곳곳을 누비며 한국 중소기업 제품의 판로개척을 위한 역군으로 활동하고 있다.

 

장영식은?

굴지의 도쿄 마루이백화점에 ‘예스마트’ 입점

장영식은 순천대 87학번이다. 흔히 이야기 하는 ‘586’으로 불리는 마지막 세대다. 87년 민주화운동의 열기가 전국을 강타하던 시기에 순천대(현 전남대) 기계공학과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공부는 뒷전이고 학창시절의 전부를 학생운동에 주력하다시피 했다. 졸업을 했지만 취직이 쉽지 않았다. 뒤늦게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미국 유학을 준비했으나 학생운동 경력이 걸림돌로 작용해 미국 비자를 거부당하자 집에서 소일하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부친이 논 한 마지기(200평)를 팔아 마련한 돈을 장 대표에게 건네며 집을 나가라고 했다. 고향에서 쫓겨난 장 대표는 서울로 올라와 청량리에서 신문배달을 하다가 일본에 가면 신문배달하면서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신문광고지를 보고 곧바로 일본 비자를 신청했다. 한 달 만에 나온 비자를 들고 도쿄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1993년 9월 20일이다. 일본어를 못하기 때문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신문배달이 전부였다.

이렇게 도쿄 생활을 시작한 그는 일본으로 건너간지 2년이 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역업에 뛰어들었다. 한국제품을 수입해서 일본에 팔고 일본의 제품들을 미국과 홍콩 등지로 수출했다. 한국에서 전자부품을 수입해 조립한 뒤 일본 시장에 내다 파는 식이었다. 수많은 제품 가운데 한국의 비데와 수소수 정수기는 일본시장에서 공전의 히트를 쳤다. 이후 면세점 사업에 뛰어들어 연간 3000억원 가량의 매출을 올리는 등 뉴커머 가운데 가장 성공한 사업가로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지난해 코로나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500여명에 이르는 직원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데 고민이 많았다. 고심 끝에 그는 일본인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한국여행을 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에 착안해 지난해 9월 면세점(EISAN) 매장에 한국식품을 판매하는 예스마트(Yesmart)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한 달 만에 흑자가 나는 것을 보고 9곳을 리뉴얼했다. 현재 도쿄와 삿포로 등 일본 전역에 걸쳐 있다. 올 연말까지 4곳이 추가로 오픈한다. 에이산이 운영하던 면세점 23곳 가운데 9곳이 식품매장으로 변신했다. 나머지 면세점은 모두 휴업상태다. 예스마트에 대한 소문은 빨랐다. 대표적으로 일본에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마루이백화점에서 입점 제안이 왔다. 장 대표는 보증금은 물론 인테리어, 냉장·냉동 시설 등 일체의 비용(15억원)을 마루이가 책임진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결국 마루이는 이사회의 의결까지 거치면서 장 대표의 조건을 모두 수용했다. 장 대표의 배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오는 12월 예스마트가 마루이 백화점에 입점한다. 일본에 살면서 산전수전 다 겪은 그의 경험이 밑바탕이 됐다. 대다수 입점업체가 을의 입장이지만 장 대표는 갑의 위치에서 협상을 이끌어내는 탁월한 수완을 발휘했다. 현재 예스마트는 보해소주가 내놓은 소주 ‘잎새주’와 막걸리 ‘순이’까지 일본 전역에 깔고 있다. 일등 브랜드가 아니지만 장 대표의 패기와 집요함으로 유명브랜드를 뛰어 넘었다. 예스마트는 냉동 청국장, 충청도 홍시, 경상도 도라지와 더덕, 수제맥주 등 2000여 한국산 제품을 팔고 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내는 그의 안목과 수완이 빛나는 순간이다. 그는 “사업도 인생도 혁신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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