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오징어게임’의 비극
[칼럼] ‘오징어게임’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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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만 객원 편집위원(한서대 교수)
박경만 본지 편집위원
박경만 본지 편집위원

살다 보니 별 일이 다 있다. 옛적 코흘리개들의 딱지치기나 뽑기, ‘무궁화꽃’ 술래 놀이, 오징어게임 따위가 세계적인 히트 상품이 되고 있다. 이걸 소재로 한 드라마 ‘오징어게임’이 넷플릭스가 방영하는 83개국에서 스트리밍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지구촌이 온통 그 ‘재미’에 흠뻑 빠져있다. 가히 ‘오징어게임’ 신드럼이라고 할 만하다. ‘오징어게임’은 456억 원의 상금이 걸린 서바이벌에 참가한 사람들이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 목숨을 걸고 극한의 게임에 도전한다는 내용이다.

모두 9화로 구성된 줄거리는 일찍이 국내 평단이 그랬듯이, 필연성이 다소 떨어지는 플롯으로 평가할 수도 있겠다. 허나 일확천금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게임 장면들은 결코 낯설지 않다. 주식이나 부동산, 코인 등에 목을 맨 요즘의 세태를 무늬만 바꿔 옮겨온 듯 싶고, 체면이나 염치 따윈 애시당초 사라져버린 시장만능의 천민자본주의를 시니컬하게 터치하고 있다. 궁지에 몰린 인간들이 요행수를 바라며 목숨을 거는 장면에선, ‘혹시나’ 하고 복권 가게에 줄서는 현실세계의 남루한 장삼이사들을 떠올리게 한다.

제작 당시만 해도 이 영화는 찬밥 신세였다. 그러던 것이 넷플릭스에 의해 뒤늦게 빛을 보면서 인간과 세상의 모순을 일거에 함축한 ‘볼거리’로 떠오른 것이다. 굳이 행간을 풀이하자면, 이 작품은 인간과 물질 문명 간의 자리매김, 인간의 상호작용과 인간욕구가 과연 ‘인간의 몫’을 어느 정도까지 보장할 것이냐는 감독의 원천적인 질문이 배어있다. 그래서 <뉴욕타임즈>는 이 드라마를 한국사회의 ‘미러링’이라고 했다. “한국의 심각한 불평등과 쇠퇴의 기회를 이용함으로써 전세계 관객들을 사로잡은 한국 문화 수출품일 뿐”이라고 했다. 

하긴 틀린 말도 아니다. ‘오징어 게임’의 등장인물은 하나같이 ‘루저’들이다. 딸에게 생일선물을 사주거나 노모의 의료비를 대줄 수단이 없는 40대 도박 중독자 성기훈의 초라한 삶이 그렇고, 서울대 졸업생으로, 고객들의 자금을 잘못 취급한 혐의로 지명 수배 중인 사나이의 꼬인 인생도 그러하다. 살기 위해 강자에게 서슴없이 몸을 파는 여인이나, 체불 임금에 고통받는 이민 노동자, 탈북자 모두 마찬가지다. 반면에 그 반대편에는 이들 루저들의 죽이고 죽는 게임을 기획하고, 그저 ‘오락’으로 즐기며 희희낙락하는 슈퍼리치들이 있다.

혹자는 보기에 따라선 꽤 철학적이라고도 한다. 과연 그런지는 모르지만, ‘오징어 게임’은 성공에 대한 사회적 욕망과, 실제 그렇지 못한 현실이 일상이 된 한국사회의 아이러니를 드러내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철학’이란 교학적 수사를 붙이기보단, 부와 성공, 배분의 정의 따위에 대한 탈신화적 냉소로 가득한 작품이라고 해야 옳다.

7화 VIP편에선 강화유리와 일반유리로 된 다리에서 떨어져 죽은 자의 시체를 산자가 건너뛰어가는 상황이 펼쳐진다. 수많은 루저들의 퍼레이드, 그리고 최후의 승자 역시 루저일 수 밖에 없는 모순된 장면들이다. 그래설까. 황동혁 감독은 현실에 대한 이런 고통스런 오마주로 인해 작업 초기 “이가 6개나 빠질 정도로” 고생해야 했다. 그 바람에 넷플릭스는 사상 초유의 떼돈을 벌었고, 애초 계약 조건이 그랬듯이, 감독이나 배우에겐 콩고물조차 없다. 숱한 리스크에 학습이 된 글로벌 기업 넷플릭스에 또 다시 허를 찔린 셈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쓰라린 건, 루저들의 행진으로 점철된 진짜 우리네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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