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 알베르 까뮈 지음, 김화영 옮김, 민음사, 2011년 04월

‘코로나 19’로 온 인류가 전대미문의 폐쇄공포와 단절에 시달리는 이 즈음, 까뮈의 소설 <페스트>는 마치 오늘의 현실을 복사한 듯한 작품이다. 팬데믹 세상에 대한 표피적 관찰을 뛰어넘어 공포와 기만, 체념, 이타적 이성과 자기애의 패러독스가 교차하는 극한의 인간 본성을 족집게 마냥 묘사해낸 소설이다. 역시 희대의 문호답다고 할까. 소설은 사람과 세상에 대한 까뮈의 탁월한 독해능력이 가감없이 빛나는 명작이라고 해야겠다.

소설에서 작가 까뮈는 ‘페스트’라는 치명적 변수 앞에서 과연 인간조건은 어떻게 변용되어 작동하는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는 일찍이 노벨상 수상 현장에서 “나는 부정(否定)에 이어 긍정을 말할 것”이라고 했다. 그의 긍정은 또 다른 작품 <반항적 인간>과 함께 소설 <페스트>로 나타났다. <페스트>는 그 표면에는 거부와 부정이 횡행하지만, 정작 그 속에는 또 다른 스텍트럼의 긍정이 잠복되어 있다.

소설은 기승전결 혹은 도입과 클라이맥스, 종결로 이어지기까지 ‘불안’을 매개 언어로 한, 한편의 잘 짜인 플롯의 전형을 보여주는 듯하다. 어느 날 마치 모든 ‘존재’의 감옥처럼, 음산하고 음울한 연기처럼, 페스트는 ‘바다를 등진’ 외진 곳의 작은 도시 ‘오랑’을 검은 색으로 점령해버리고 만다. 숱한 사람들이 차례로 죽어가면서 이곳은 봉쇄되고, 오도가도 못한 사람들은 재앙에 대응하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불안’과 두려움을 묘사하곤 한다. 그로부터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듯, 다양한 방식의 ‘불안’ 캐릭터들이 탄생되고, 결국엔 ‘윤리적 반항’이란 작가의 메시지로 수렴되는 양상으로 스토리는 전개된다.

그런 복합적이고 메타적인 의미는 마치 전장의 진법이나 전술을 보듯, 치밀하게 배치되고 창조된 캐릭터로 100% 표현된다. 극중에서 작가는 페스트와, 그로 인해 온통 ‘윤리적 반항’으로 얼룩진 세상에 대한 자신만의 ‘긍정’의 인식을 표현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그 도구이자 텍스트의 서술자로서 내과의사 리유를 내세웠고, 리유의 극중 서술과 행위에 주석을 달기 위해서 타루와 그랑과 같은 ‘반항’의 캐릭터를 중심에 두었다. 그 동심원적 외곽에 있는 ‘도피’의 캐릭터인 랑베르, 코타르, 그리고 자못 초월적 태도의 파늘루 신부 등도 결국은 ‘반항’의 인간조건을 성숙케하는 소품으로 동원되었다. 가히 한 점 나무랄데 없는, 까뮈의 절묘한 내러티브 전략이다.

까뮈는 감염병 앞에서 인간이 갖는 특별한 감정을 무척이나 복합적이고 세련된 언어로 번역해낸다. 단순히 감염병 세상의 희로애락을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페스트로 황폐해진 물리적 실존만이 타당한 실존이 아님을 진술하며, 지각되는 대상 너머를 포착할 수도 있다는 현상학적 상상력이 오히려 전체 행간을 주도한다. 작가 까뮈는 이를 위해 ‘불안’이라는 근원적 감정을 갖가지 표정과 색깔의 캐릭터로 능청스러울 만큼 의역하고, 분장한다. 스토리텔링의 묘미를 살리면서도 결코 ‘불안’한 것 같지 않되, 가볍지 않은 텍스트 선율로 독자 일반과 화합하고 있는 것이다.

팬데믹이 거의 2년 가깝도록 지구촌을 뒤덮고 있는 지금, <페스트>는 마치 21세기 ‘코로나19’와의 평행이론을 증거하듯, 독자와 화해하고 공감을 시도한다. 일찍이 <눈먼 자들의 도시>의 주제 사라마구가 다품종 소량의 캐릭터 나열로 독자들을 설득했다면, <페스트>는 ‘선택과 집중’의 캐릭터 전략으로 ‘불안과 공포’라는 대문자 서사를 저격했다. 그거야말로 까뮈 특유의 천재성이 아닐까 싶다.

과연 언제 이 지긋지긋한 ‘코로나19’가 물러갈까. 그런 암담하기까지한 현실에 대해 옛적 ‘까뮈’는 예사롭지 않은 시그널을 던진다. 그 중 하나가 인간조건에 대한 확신이다. 확신이라기보단 증언이다. 불안과 도피와 체념어린 반항, 그리고 위선적인 확증이 뒤범벅된 ‘페스트’ 세상에서도 그랬듯이, 인간조건은 여전히 성숙해지고 있음에 대한 증언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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