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만 객원 편집위원(한서대 교수)

박경만 본지 편집위원

디지털혁명이 만개할수록 불평등의 패러독스에 대한 가설과 담론 또한 만발하고 있다. 대체로 보아 운과 타고난 재능, 의지와 본성이 교차하는 인간세상에서 평균적 개념의 절대 평등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는게 장삼이사의 상식이다. 아예 밀턴 프리드먼은 평등보단 차등, 공평보단 불공평에 방점을 찍었다. 그는 일찍이 ‘불공평과 불평등의 정의’를 콘텐츠로 한 ‘선택할 자유’(Free to Choose)를 책으로 펴내며 시장이 스스로 최적의 균형을 찾아갈 자유를 예찬했다. 대신에 국가의 수요 관리를 질타하면서, 통화에 대한 최소한의 통제와 자유로운 신용팽창만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재산권의 천부적 속성을 주장했고, 독점체제마저도 부(富)의 총량을 늘려 궁극엔 ‘소비자 복지’를 극대화할 것이라고 옹호하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신자유주의의 원조답다고 할까.

하지만 과연 그의 ‘자유’가 자유시장에 충실한 것인가. 시장 즉 기업의 자유방임이 정녕 시장친화적일까. 그런 반(反)프리드머니즘의 사변은 오늘날까지 끊이지 않는다. 기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경쟁을 배제한 강자독식의 시장은 민주적인 소비자 선택의 오지랖을 옥죌 수 있다. 시장을 기획할 능력도 없는 소비자들의 ‘선택할 자유’를 위축시킬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과연 ‘공정한 룰’의 자유지상주의나 능력주의가 분배정의의 규준이 될까도 싶다. 애초 ‘자유주의’란 무엇인가. 17~18세기, 정치와 종교권력 앞에서 평등하게 살 자유를 요구하면서 태동했던게 아니던가. 그러나 20세기 들어 이율배반적인 전복이 이뤄졌다. ‘소수의 자유’를 최고 가치로 내세운 조건으로 내건, 불평등의 독사(doxa)로 뒤집어지며, 이른바 신(新)자유주의와 ‘프리드먼’ 일파가 출현한 것이다.

그래서 영국의 사회학자 콜린 크라우치는 이를 두고 “자유주의를 배반한 신자유주의”라고 일갈했다. 순수시장이라는 불가능한 꿈을 꾸면서 기업을 정치권력화하고, 시장을 방관하는 작은 정부를 유도했으며, 가계를 빚더미로 나앉게 한 ‘케인스주의의 사유화’를 초래한 주역으로 프리드먼 등을 조준했다. 그래설까. 크라우치의 저술과 언어는 시종 불평등을 인질로 삼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분노로 가득하다. 좌파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도 프리드먼과 ‘시카고 보이’들에겐 아프게 들릴 법하다. 피케티는 소득을 분모로 한 수익률을 기준으로, 자산과 자본소득이 노동소득보다 항상 우위에 있다고 개탄했다. 쉽게 말해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소수 부유계층에 자산과 자본이 집중돼 불평등이 악화된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 3세기의 방대한 데이터를 해부하며, 누군들 쉽게 인멸하기 힘든 불평등 역사의 증거를 펼쳐보였다.

지금은 ‘공정’의 외피를 입은 불공평, 그리고 ‘평등치 못한 공정’이 만연하는 세상이다. “우연히 자신에게 주어진 선천적 또는 사회적 환경을 이용하려면, 그 행위가 반드시 공동의 이익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마이클 샐던의 제언에 공감이 가는 것도 그래서다. 샐던은 평등과 쌍을 이루는 ‘공정’을 두고 아예 ‘착각’이라고 했다. 애초 그의 책에선 공정을 ‘폭군’(Tyranny)이라고 했으나, 국내에선 ‘착각’으로 순화되어 번역되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공정’이란 단어는 ‘진정한 공정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의역되어야 할 것이다.

‘불평등의 정의(正義)’는 애당초 형용모순이다. 디지털 기술주의의 객체로 전락될 수도 있는 지금의 대중으로선 그런 정의롭지 못한 정의는 그만 사양할 법도 하다. 그래서다. 갑작스레 ‘프리드먼’이 널리 오르내리는 이 즈음, 그 유명한 차등의 원칙을 설파하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마땅히 존재해야 하는 방식을 결정할 순 없다”는 존 롤스의 격앙된 목소리에 새삼 주목해보자. 타인의 빈곤이 나의 부의 조건이 되어선 안 된다는, 오래 공유된 기억도 되짚어봐야 할 것이다. 특히 ‘불평등’과 ‘자유’의 메타언어를 해독할 만한 폭넓은 텍스트와 리터리시, 변증적 사유 또한 필수다. 책 한 권 안 읽은 사람보다 더 무서운, ‘책 한 권만 읽은 사람’이 안 되기 위해서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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