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의 시대, 휴머니즘을 찾아서-
김동연의 '아버지와의 대화'

[중소기업투데이 박철의 기자] 지나치게 빠르고 또 복잡하다. 우리가 살아 숨쉬는 요즘 세상이 그렇다. 위대한 것은 예외없이 단순하다고 했다. 진리 또한 그러하여, 만고불변의 진리로 일컬어지는 것들은 의외로 단순하고 가까운 곳에 있다. 모두가 피로하고 지쳐있다. 이럴 때일수록 어떤 메시지가 필요할까. 코로나19로 개개인이 각각의 섬으로 부유하는 그야말로 단절의 시대.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보이지않는 연결의 복원이 절실한 시점으로 인식된다. 인간성의 회복, 휴머니즘의 복원이 필요하다고 여겨 찾은 주제가 다름아닌 ‘어머니’다. 모성(母性)은 생명을 품는 힘이자 마지막까지 지탱하는 버팀목이다. 무한한 생명력과 포용력의 원천인 모성이 실종된 시대. 본지는 ‘우리 시대의 어머니’, 땅속에 묻혀있던 보석같은 ‘어머니 이야기’들을 발굴해 시리즈로 싣는다. 자식을 훌륭히 성장시킨 인사들의 생생한 인생스토리도 곁들였다.

▲김낙진 동원아이앤티 회장 ▲정영수 CJ그룹 글로벌경영고문 ▲신경호 일본 고쿠시칸대 교수 ▲구자관 ㈜삼구아이앤씨 대표 ▲이광희 (사)희망의망고나무 대표 ▲박경진 진흥문화㈜ 회장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사단법인 유쾌한반란 이사장) 등 7인이 값진 스토리를 흔쾌히 풀어놓았다.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에 한줄기 빛이 되고 희망이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편집자주>

지난 6월 (사)유쾌한반란이 농어촌 혁신 지원 프로그램의 하나로 충남 서산의 한 어촌계를 방문했을때 어민들과 함께 한 김동연 전 부총리(가운데).    

감사할 줄 알고 물러설 때를 아는 공직자

김동연은 공직자 시절 두개의 버킷리스트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대화’와 ‘감사할 줄 알고 물러설 때를 아는 공직자’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25년 만에 아버지와 대화하고 싶었던 꿈은 이루어졌다. 단 하루만이라도 대화를 할 수 있다면 자신의 수명을 일 년쯤 단축해도 좋겠다던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는 이제 두 아들의 아버지로서 자식들과 철든 남자 대 남자로서 대화하고 싶다는 소망을 자신의 버킷리스의 맨 윗줄에 올린다고 했다. 큰 아들은 좋은 곳에 조금 먼저 갔을 뿐이고, 그 뒤를 따라 언젠가 가슴 벅찬 해후(邂逅)를 꼭 하기를, 그래서 우리가 알지 못했던 세상 이치에 대한 비밀을 알게 돼서 어리둥절해하면서도 함께 기뻐하기를, 그 소망으로 남은 생을 살기를 소망했다.

김동연은 “나는 누구였고 무슨 꿈을 갖고 있었는지, 또 두 아들과 인생과 사랑을 이야기하고, 신(神)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며 “어쩌면 돌아가신 아버지도 대화의 장(場) 어디에선가 나타나실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 했다.

김동연의 아버지는 서른셋에 불귀의 객이 되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나이에 김동연은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당시 그의 큰 아들이 네 살 때이며 작은 아이는 태어나기 전이다. 삼십대 초반의 젊은 아버지로서 자식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매(每) 나이 때마다 서로 생각을 나누고 싶었던 것이다. 어쩌면 김동연 자신이 아버지와 남자대 남자로 대화를 하지 못했던 아쉬움이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은 어린 아들이지만 나중에 아들이 커서 철이 든 뒤 편지를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김동연은 첫 편지에서는 큰 아이와 10년 또는 20년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인생을 이야기하고 싶다고 썼다. 두 번째는 자신의 독서편력을 소개하며 책읽기에 관한 생각을, 세 번째는 인생을 살면서 느꼈던 행복과 가치에 대한 내용이었다. 김동연은 큰 아들이 살아 있을 때 여행과 등산을 즐기면서 대화를 했고 편지도 꾸준히 썼다. 큰 아들과 일곱 살 차이가 나는 작은 아들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큰 아들이 세상을 뜨면서 김동연의 편지도 대화도 중단되었다. 하지만 그는 두 아들과의 대화를 새로운 꿈으로 연결하고 있다고 했다.

다음은 김동연 전 부총리가 기획재정부 예산실장으로 재직할 당시 신동아 2011년 4월호에 기고한 글을 요약 발췌했다.

아버지의 꿈

항상 꿈을 꾸었다. 그 많던 꿈 중에서 실현이 불가능한, 그래서 더욱 절실한 꿈이 하나 있었다.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의 버킷 리스트 중에서 늘 앞자리를 차지하는 꿈이었다. 바로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대화’였다. <중략> 만약 아버지와 대화를 할 수 있다면 처음에는 아버지를 원망하리라 생각했다. 뭐가 그리 급해서 젊디젊은 아내와 자식 넷을 두고 그리 빨리 가셨냐고, 장남인 제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시냐고, 제 좁은 어깨에 너무 무거운 짐을 얹어서 힘에 겹다고, 왜 이렇게 우리 가족을 고생시키느냐고….

한참 뒤에는 아버지가 도대체 어떤 분이었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학력이 짧지만 젊어서 사업을 크게 일으켰던 분. 어려운 사람 도와주길 좋아하셨던 분. 수해가 나면 늘 어린 나를 앞세워 모 신문사에 가서 수재의연금을 내곤 하시던 분. 고모 말씀에 따르면 혼자되신 할아버지를 어린 나이 때부터 극진히 모신 더없는 효자라는 분. 내가 학교에서 일등을 하지 못하면 어김없이 회초리를 들 정도로 엄했던 분….

그런 그분이 어느 몹시 추운 날 등굣길에 내가 너무 추워하자 “춥지? 춥지 않게 해줄게” 하며 불러줬던 ‘꽃집의 아가씨는 예뻐요/ 그렇게 예쁠 수가 없어요’라는 노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내가 발견한 아버지의 일기장에서 본 젊은 아버지의 고민들. 그 분을 만나면 나는 묻고 싶었다. 도대체 아버지는 어떤 분이었냐고. 어떤 꿈을 가지고 계셨냐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25년 되던 해 고향에 있던 산소를 이장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유골은 차량 뒷자리에, 아버지 유골은 조수석에 모셨다. 나는 조금 떨어진 거처로 바로 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총각 때부터 오래 사셨던 동네와 집을 돌아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아주 천천히 차를 몰면서 옆에 모신 아버지 유골을 향해 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버지 이제 아버지 사셨던 집 쪽으로 갑니다. 25년 만이시지요. 그동안 많이 바뀌었습니다.” 나는 갑자기 어떤 생각에 눈물을 왈칵 쏟았다.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간절히 지니고 있던 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꿈. 내 수명이 일 년 단축되더라도 단 하루 아버지와 대화를 했으면 했던 꿈. 그 꿈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아버지는 25년 만에 햇빛을 보셨고 나는 아버지와 만 하루를 지낼 수 있었다. 그 하루 대부분 시간 내내 나는 소리죽여 눈물을 흘리며 그동안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드렸다. 어쩌면 아버지께서 응답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불가능하리라 생각되었던 내 버킷 리스트 중 하나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끝>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 주요 이력

▲덕수상고·국제대학교(現 서경대) 법학과 졸업 ▲서울대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 ▲미시간대 대학원 정책학 석·박사 ▲제26회 행정고시·제6회 입법고시 합격(1982) ▲기획예산처 사회재정과장·재정협력과장(~2002) ▲대통령 비서실장 보좌관(2002) ▲세계은행 선임정책관(2002~2005) ▲기획예산처 재정정책기획관(2006~2007) ▲대통령실 경제수석실 경제금융비서관(2008~2009) ▲대통령실 국정기획수석실 국정과제비서관(2009 ~ 2010) ▲기획재정부 예산실장(2010~2012.2) ▲기획재정부 제2차관(2012.02~2013.03) ▲국무조정실장(2013.03~2014.07) ▲제15대 아주대학교 총장(2015.02~2017.06)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2017.06~ 2018.12) ▲ 現 사단법인 ‘유쾌한반란’ 이사장

저작권자 © 중소기업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