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살롱] 神이 사랑한 섬 ‘소록도’
[문화살롱] 神이 사랑한 섬 ‘소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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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에게 버림받고 신에게 사랑받다
어린 사슴을 닮은 섬 '소록도'. 저 깊고 푸른 바다는 한때 아무나 건널 수 없는 '숙명(宿命)의 바다'였다.           

[중소기업투데이 황복희 기자] 전남 고흥에서 소록도 사이 그 푸른 바다는 숙명(宿命)의 바다였다. 건너고싶어 건넌 자가 없었으며 아무도 가고싶지 않은 물길이었다.

시선조차 함부로 주지않던 섬, 그 외로운 섬에 누군가가 발을 디딘다면 한평생 천형(天刑)을 걸머지고 살아야하는 숙명이었다. 피붙이도 외면하는 그야말로 ‘몹쓸병’ 이었다. 어버이는 병에 걸린 자식을 수용소나 다름없던 그 섬에 혼자 두고 떠나며 차마 발길이 떨어지질 않아 주저앉아 피눈물을 흘렸고, 홀로 남은 자식은 ‘돌아보지 마라’는 어버이의 충고에도 고개를 돌렸다가 어버이의 마지막 모습으로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았다. 부모 자식간의 정리(情理) 만한 것이 어디 있던가. 어느 어버이는 늙어 애써 키운 육지의 성한 자식들이 서운히 대하자, 수십년이 지난 그제서야 섬에 두고온 자식 하나를 떠올리고 찾았다가 잊지않고 기다렸다며 반가이 맞는 자식 앞에 눈물을 쏟기도 했다. 그처럼 눈물겨운 숙명도 없을 것이었다.

한때 수천명이 동일한 숙명을 안고산 그 섬은 ‘천형의 섬’으로 불렸다. 어린 사슴 모양의 작은 섬이 감당하기엔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연이 참으로 눈물겨워 땅조차 버거웠을 것이다.

1962년 2월 어느날 파란눈의 한 20대 여성이 고흥 녹동항에서 소록도로 향하는 배에 오른다. 그녀의 손엔 작은 트렁크 하나가 들려있었고, 멀리 낯선 섬을 바라보는 눈은 어린사슴의 눈망울처럼 맑고 순했다. 오스트리아에서 온 수녀 겸 간호사 마리안느 스퇴거. 사시사철 만년설을 머리에 인 알프스 산자락 인스부르크에서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소록도병원이 간호사를 원한다는 소식을 듣고 ‘봉사의 소명(召命)’ 그거 하나 깃발처럼 가슴에 꽂고 이역만리 동양의 작은 나라를 찾은 것이다.

그로부터 4년뒤인 1966년 마리안느와 같은 간호학교 출신의 마가렛 피사렉이 뒤따라 섬으로 들어온다. 한 살 차이인 두 사람은 이후 둘도없는 자매가 되어 40여년간 ‘소록도의 천사’이자 ‘한센병 환자의 어머니’로 살아간다.

'소록도 천사' 마리안느와 마가렛. 꽃다운 20대에 소록도에 들어와 40여년간 한센인들을 위해 봉사하고 2005년 '짐이 되기 싫다'며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
'소록도 천사' 마리안느와 마가렛. 꽃다운 20대에 소록도에 들어와 40여년간 한센인들을 위해 봉사하고 2005년 '짐이 되기 싫다'며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

한센병에 대한 지독한 편견으로 의사와 간호사들이 장갑을 끼고 환자를 살필 때, 두 사람은 환자들의 만류에도 약을 꼼꼼히 발라야한다며 맨손으로 환부를 치료했다. 오스트리아에서 가져온 오일을 환부에 부은뒤 맨손으로 쓸어내렸다. 곁에서 간호를 돕던 한 한국인 간호사는 나중에 이렇게 회고했다. “환자 앞에 있어야 간호지 간호사들이 차트 정리하고 의사 처방 받고 이런데 시간을 많이 쓰면 간호가 아니다. 저보고도 공부는 절대 하지 말라고 하더라. 손과 발이 부지런해야지 간호지 머리만 잘 회전시키면 간호가 아니라고.”

치료가 끝나면 죽을 쑤고 과자를 구워 바구니에 담아 마을을 돌았고, 생일을 맞은 환자가 있으면 자신들이 사는 사택에 초대해 직접 구운 빵을 대접했다. 환자가 직원들이 사는 지역에 들어가는 것은 상상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환자와 직원, 내 종교 네 종교 이런 구분없이 서로 넘나드는 것, 두 사람은 그렇게 구별없음을 행동으로 실천해보였다.

제대로 된 정부지원도 없던 시절, 병동과 목욕탕, 영아원 등 여러 시설물을 하나둘 마련한 것도 두 사람이었다.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오스트리아 가톨릭부인회에 편지를 보내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고, 비자연장을 위해 고향을 방문할때마다 개인후원자들을 만나 모금활동을 했다. 지금도 현지 가톨릭부인회 사무실에는 당시 두 사람이 보낸 편지가 낡은 세월의 더깨를 입고 보관돼 있다.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열성으로 1970년대 후반 당시로는 거액인 3000만원이 소록도로 날아든다. 오스트리아 가톨릭부인회가 보낸 후원금으로 두 사람은 50평 규모의 결핵병동을 지어 소록도병원에 기증했다. 본국의 지인이나 봉사단체가 보내온 후원금을 모아 정신병동과 목욕탕도 지었다. 본국 수녀회가 보내오는 두 사람 몫의 생활비도 환자들을 위해 쓰여졌다. 우유와 간식을 사고, 성한 몸이 돼 떠나는 사람들의 손에 노자로 쥐어졌다.

환자들이 낳은 자녀들을 돌볼 곳이 없자 허름한 창고를 고쳐 영아원을 만들어 우유를 먹이며 돌본 것도 두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외국 의료진 초청을 주선해 한센병으로 인해 생긴 장애교정 수술을 받도록 해주었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베풂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섬에 머문 40여년간 한푼의 댓가도 받지 않았다. 오로지 자원봉사자 신분으로 헌신과 봉사를 다했다.

당시 두 사람의 보살핌을 받은 한 환자는 이렇게 회고했다.

저희들한테 특별하신 분들입니다...다정한 말 한마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오늘까지도 잊어본 적이 없어요. 최고의 선물을 받은거죠. 

그러면서 이런 말을 했다. “그들이 보여준건 사랑이었어요.”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희망이라곤 없는 이 섬에 무엇보다 희망을 심어야하고 그렇게 희망 안에 믿음 안에 사랑 안에 살아야된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가족과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이들은 희망을 잃은채 바다에 빠져죽고 나무에 목을 메던 때였다.

60년대 당시 섬에는 이름부터가 가슴이 미어지는 ‘수탄장(愁歎場)’이라는 곳이 있었다. 전염의 공포가 컸던 시절이라 한센인들은 그들이 낳은 자식과 함께 살 수가 없었다. 보육소에 아이들을 맡기고선 일정한 간격을 두고 떨어져 눈으로만 혈육을 만났다. 혹여 나균이 옮겨갈까봐 바람이라도 부는 날에는 바람을 등지고 아이들을 세웠다. 한쪽엔 아이들이, 조금 떨어진 반대쪽엔 그 아이를 낳은 엄마들이 쭉 늘어서 하염없이 그리운 눈빛을 주고받는 것이 부모자식간의 유일한 소통이었다. 소록도에 뿌리내린 나무 한그루, 풀 한포기, 바람 한자락 어디에도 눈물젖은 탄식이 흐르지 않는 곳이 없었다.

소록도성당
소록도 주민들의 기도가 머무는 곳, 소록도성당

2005년 11월23일, 전체 둘레라고 해봐야 14㎞인 소록도 집집마다 편지 한통이 도착한다.

사랑하는 친구 은인들에게,이 편지를 쓰는 것은 아주 어렵게 썼습니다. 한편은 사랑의 편지지만 한편으론 헤어지는 섭섭함이 있습니다.이제는 저희들이 천막을 접어야 할 때가 왔습니다. 부족한 외국인으로서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아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의 부족함으로 마음 아프게 해드렸던 일에 대해 용서를 빕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마가렛, 마리안느

당시 마리안느는 70세, 마가렛은 71세였다. 전라도 사투리에 한글까지 깨쳐 ‘큰 할매’ ‘작은 할매’로 불린 두 사람은 고령이 되자 “소록도에 도움이 아닌 짐이 되어간다”며 편지 한 장 달랑 남겨두고 조용히 고국으로 돌아갔다. 떠나던 날 새벽에도 여느때와 다름없이 환자들 곁에서 따뜻한 우유를 따라주고 아픈 데를 살핀뒤 작별인사도 없이 홀연히 섬을 나섰다.

배를 타고 떠나는 두 사람의 손엔 처음 섬에 들어올 때 가져왔던 해진 가방 한 개만 들려있었다. 두 사람이 기거했던 조그만 방에는 십자가와 책상만이 주인을 잃은채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두 사람은 나중에 소록도를 떠나던 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멀어지는 섬과 사람들을 멀리서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그들이 떠날 당시엔 섬의 형편이 많이 좋아지고 환자도 600명 정도에 그쳤다. 처음 왔을때만 해도 6000명 환자에 아이들도 200명인데다 약도 없고 돌봐줄 사람도 없어 한 사람 한 사람 치료해주려면 평생 이곳에서 살아야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었다고 그들은 회고했다. 한 주민은 “말이라도 하고 떠나야지, 고향을 잃어버린거, 하늘이 무너지는거 같았다”고 당시 심경을 전했다.

마리안느와 마가렛이 40여년간 기거했던 사택. 십자가와 작은 책상 하나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떠나고, 섬은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잠겨 상심으로 한동안 식음을 끊는 사람까지 있었다. 섬 사람들은 일손을 놓고 마리안느와 마가렛을 위한 기도를 올렸으며 그 기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사람은 가도 정신은 남아, 섬 사람들은 마리안느와 마가렛을 여전히 그리워하며 추억하고 있다. 어찌 잊을 수 있겠나. 소록도를 찾는 외지인들 또한 섬 곳곳에 스민 두 사람의 헌신과 봉사, 사랑의 정신을 뭉클한 감동으로 안고 한결 이타적인 사람이 되어 육지로 돌아간다.

이후 지자체가 나서 마리안느와 마가렛 기념공원, 기념관, 기념탑, 나눔연수원 등을 조성해 작별인사도 없이 떠난 두 천사를 기리고 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이 오랜 기간 뿌린 사랑의 씨앗은 남은 사람들에 의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선한 작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소록도성당의 김연준 신부는 두 사람의 이름을 딴 사단법인 마리안느와 마가렛을 만들어 캄보디아 등 도움이 필요한 다른 나라를 돕고 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다큐멘터리 영화로도 제작돼 세상에 깊은 울림을 주었다. 지난 2016년 국립소록도병원 개원 100주년을 맞아, 오스트리아에 가 있던 두 사람의 영상을 담아 이듬해 다큐영화로 만들어졌다.

우리 정부는 2016년 두 사람에게 명예국민증을 수여했다. 2002년 월드컵 신화를 낳은 히딩크 감독에 이은 두 번째 명예국민이었다. 그 해 정부 초청으로 11년만에 한국을 찾은 마리안느는 변함없이 자신을 낮추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한 일 중 특별한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환자들과) 제일 좋은 친구로 살았어요.

사단법인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2017년 11월부터 두 사람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하는 범국민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런 움직임에 두 사람은 “그저 아프고 소외된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었고 그 일을 다했으니 떠나는 것이 맞고, 대가를 위해 한 일이 아니다”며 상을 받고 또 자신들에게 고맙다고 하는 그런 상황이 생기는 것이 싫다는 뜻을 한사코 전했다.

80대 중반이 된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현재 오스트리아 정부의 기초연금을 받으며 요양원에서 지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100주년 기념 다큐영상에서 마가렛은 치매를 앓고있는 중에도 소록도에서 일들은 또렷이 기억하며 이렇게 말한다.

다 보고싶어, 다들 좋아했어, 이제 다 지났어... 소록도시대, 행복있게 살았어요, 저기에서, 아주 좋았어.

일제시대 조성된 소록도 중앙공원 내 소나무숲. 공원 안에 시인 한하운의 '보리피리' 시비가 있다. 
일제시대 조성된 소록도 중앙공원 내 소나무숲. 공원 안에 시인 한하운의 '보리피리' 시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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