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살롱] 이순신의 '눈물'
[문화살롱] 이순신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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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의 탄신일을 맞아..

[중소기업투데이 황복희 기자] 지난 28일은 충무공 이순신의 탄신일이다. 이순신은 1545년 3월8일(음력)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서울 중구 인현동 1가 31-2번지, 을지로 인쇄골목의 한 건물 자리가 생가터다. 외세의 침입으로 풍전등화와도 같던 나라를 구하고 남해의 바닷바람으로 스러진 이순신의 삶과 정신은 500년이 지난 지금에도 후세에 깊은 울림을 주는 ‘불멸의 신화’로 존재한다. 이순신이 없었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지, 1910년 경술국치의 치욕이 300년 전으로 소급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땅은 유사 이래 어렵지 않은 때가 있었던가 싶게 수많은 외세의 침탈과 온갖 내홍으로 상처입은 수난의 역사를 안고 있다. 동족분쟁의 6.25를 거쳐 지금도 한반도 한가운데 선을 그은채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로 대치하고 있다. 다행히 대한민국은 경제적인 부흥을 이뤄 세계 10대 경제대국에 드는 눈부신 성과를 일궜으나, 현 시점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방면에서 새로운 차원의 변화가 소용돌이치는 세계사적 변혁의 물결 앞에서 다시금 ‘도전과 응전’의 시험대에 놓여있다. 이순신의 삶과 정신을 돌아보며, 우리가 무엇을 해야하고 또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는 의미에서 ‘인간 이순신’의 삶을 조명해보았다. <편집자주>

충무공 이순신의 영정. 이순신과 절친했던 서애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이순신의 사람됨은 말과 웃음이 적었다. 용모는 단아하고 곧아서 마치 근신하는 선비와 같았다'고 표현했다.
충무공 이순신의 영정. 이순신과 절친했던 서애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이순신의 사람됨은 말과 웃음이 적었다. 용모는 단아하고 곧아서 마치 근신하는 선비와 같았다'고 표현했다.

전남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와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사이 해협은 물살이 빨라 ‘우우우’ 하며 우는 소리가 20리 밖에서도 들린다고해 ‘울돌목’이라 이름 붙었다. 1597년 9월 이순신이 불과 12척의 전선(戰船)으로 왜선 133척을 맞아 대승을 거둔 명량대첩의 전승지다.

이제 신에게 아직도 12두척의 전선이 있사온즉... 죽을힘을 내어 싸우면 할 수 있습니다.(今臣戰船尙有十二)

이순신의 필적. '必死則生 必生則死'
이순신의 필적. '必死則生 必生則死'

명량 바다로 나아가기 앞서 이순신이 선조에게 올린 장계의 내용이다. 명량에서 적을 맞은 이순신은 새까맣게 에워싼 적선을 보고 얼굴빛이 질린 조선수군을 향해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必死則生 必生則死)”는 말로 독려한다. 이순신은 12척의 전선을 적앞에 일자진(一字陣)으로 세운다.

‘이순신’이란 이름을 들으면 우리는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당쟁으로 얼룩진 조선의 역사에서 왜구의 침입으로 바람앞의 등불과 같던 나라를 피를 토하는 절박한 심정으로 지켜낸, 시대를 초월한 우리의 영웅이다. 충절과 용기를 상징하는 자부심의 근원이다.

당시 임금은 무능했고 대신들은 당파싸움에 여념이 없는 가운데 마땅한 지원조차 없었으니 이순신이 세운 23전23승의 무패신화는 세계 해전사에서도 빛나는 기록으로 남아있다.

이순신이라고 해서 거친 바다가 만만했을리 없다. 함경도에서 여진족과 싸우다 1591년 진도군수로 임명된 이순신에게 바다는 두렵고도 낯선 전장(戰場)이었다. 그럼에도 적의 허를 찌르는 독보적인 전략·전술과 두려움에 떠는 군사들로 하여금 죽음을 무릅쓰고 나아가게 하는 탁월한 지휘통솔력 게다가 인품까지, 지덕체(智德體)와 문무(文武)를 겸비한 이상적인 군인으로서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이순신의 위대함은 적장이었음에도 이웃 일본에서도 존경을 표시할 정도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시기에 해군을 창설해 이순신의 업적과 전술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전선과 무기는 고사하고 군사들을 먹일 군량미 조차 부족한 상황에서 이순신은 어떻게 그같은 연전연승의 신화를 써내려갈 수 있었을까. 그 뒤에는 한 인간으로서 이순신의 엄청난 내면적 고뇌와 고통이 자리잡고 있음을 ‘난중일기’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어둠’이 있었기에 ‘빛’이 있음이다.

아쉽게도 역사는 장수(將帥)로서 이순신의 역량과 업적에 초점을 맞췄지, 그가 노량 앞바다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기까지 정신적 육체적으로 얼마나 큰 고뇌와 고통에 시달렸는지, 인간 이순신의 내면적 영역은 소홀히 대한 측면이 없지않다. 적을 상대로 싸워 이긴 전쟁영웅이기 이전에 임금의 불신(不信)에 아파하고 조정의 모함에 분노할 줄 아는, 이순신도 한 인간이었다.

그늘에 묻혀있던 ‘인간 이순신’을 제대로 들여다볼때 우리는 비로소 이순신이란 역사적 인물과 온전히 마주할 수가 있을 것이다.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전쟁이 일어날 것에 대비해 1592년 1월1일부터 쓰기 시작해 전사하기 이틀전인 1598년 11월17일까지 7년간의 전쟁기록이다. 전쟁 및 출동상황, 관아의 업무,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장계와 편지, 자작시 등을 곁들여 세세하게 담고 있다.

“하루종일 홀로 빈 정자에 앉았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에 치밀어 마음이 어지러웠다. 어찌 이루다 말할 수 있으랴. 정신이 혼미하기가 꿈에 취한 듯하니, 멍청한 것도 같고 미친 것도 같았다.”(1594년 5월9일)

“이날 밤은 신음으로 날을 새웠다”(1594년 7월29일)

“촛불을 밝히고 혼자 앉아 나랏일을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또 팔순의 병드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초조한 마음으로 밤을 새웠다.”(1595년 1월1일)

“바람은 싸늘하고 차가운 달빛은 대낮같아 자려해도 잠들지 못하고 밤새 뒤척였는데 온갖 근심이 가슴에 치밀었다.”(1595년 10월20일) <난중일기 中>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이 이처럼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전장에선 130여척의 적선 앞에서 고작 12척으로 일자진을 펼칠 정도로 용맹한 장수임에도, 평상시엔 적의 동태를 탐지하고 어떻게 하면 이길지 고민하는 것과 함께 백성들의 고초, 어머니, 자식 등을 염려하느라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은채 밤잠을 뒤척이기 일쑤였다.

인간 이순신의 고통은 명량해전이 있던 1597년 최고조에 달한다. 그 해 3월 모함으로 서울로 압송돼 투옥됐다가 백의종군의 신세가 되어 고향 아산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의 사망소식을 접한다. 어머니는 여수에서 이순신이 풀려났다는 소식을 듣고 아들을 보기 위해 오던 도중 배 안에서 홀로 세상을 뜬다. 효자였던 이순신은 피눈물 나는 당시의 심경을 난중일기에 이렇게 남겨놓았다.

“일찍 식사후에 어머니를 맞이할 일로 바닷가 길에 올랐다. 얼마후 종 순화가 와서 어머니의 사망소식을 알렸다. 달려나가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해 보였다...가슴이 찢어지는 비통함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으랴. 나는 아주 지친데다 남쪽으로 갈 일이 또한 급박하니 울부짖으며 곡을 하였다. 오직 어서 죽기만을 기다릴 뿐이다.”(1597년 4월13,16일)

이순신은 어머니 장례도 못치르고 출정을 하며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사이에 어찌 나와같은 사정이 있겠는가. 빨리 죽는 것만 못하구나”라고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이순신의 애통함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6개월뒤 아끼던 아들이 왜적의 칼에 비참하게 죽는다. 그 해 9월 명량해전에서 승리하고난 다음달 셋째 아들 면(葂)이 죽었다는 비보가 당도한다.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했고 이순신을 가장 빼닮은 아들이었다. 명량해전 직후 모친을 모시고 아산집에 가있다가 길에서 왜적의 복병을 만나 칼을 맞고 죽었다. 스물한살의 꽃다운 나이였다. 명량해전에서 적장의 목을 벤 이순신에게 복수하기 위해 왜적이 아산집에 불을 지르고 의도적으로 자행한 소행이었다.

“하늘이 어찌 이처럼 인자하지 못한 것인가.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천지가 어둡고 밝은 해조차 빛이 바랬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간 것이냐..내가 지은 죄 때문에 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너를 따라 죽어 지하에서 함께 지내고 함께 울고싶건만..”(1597년 10월14일)

이순신은 “마음이 죽고 형상만 남은 채 부르짖어 통곡할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일년 같다”며 단장(斷腸)의 아픔을 토해냈다.

남해 관음포와 이순신순국공원. 이순신이 순국한 바다라는 뜻에서 '이락파(李落波)'라고도 부른다. 마주보는 해안에 이락사가 있다. 

적의 간담을 서늘케하는 바다의 용장(勇將)이지만 어머니와 아들의 죽음 앞에서 이순신은 스스로 죽고싶은 심정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연약한 한 인간으로서의 내면을 유일하게 표출하는 통로였다. 어머니와 아들이 불귀의 객이 되고 그로부터 1년뒤, 1598년 11월19일 이순신은 남해 노량에서 왜적의 총탄에 의해 숨을 거둔다. 

전쟁이 한창 급하니 부디 나의 죽음을 말하지 말라.

그날 바다 한가운데로 큰 별이 졌다.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의 조선수군은 밤을 새고 날이 밝도록 왜선 500여척과 사투를 벌여 적선 200여척을 물리치는 전공을 세웠다. 이순신이 전사한 곳은 현 남해군 고현면 차면리에 있는 관음포로 고려말 팔만대장경 일부가 만들어졌다고 해서 관음이라고 부른다. 12월4일 조정은 이순신을 우의정에 추증한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날 노량 앞바다에서 이순신은 자의적으로 죽음을 택한 것일 수도 있다고. 이순신에 대한 선조의 경계와 불신, 조정의 계속된 모함과 질투는 오로지 우국충정으로 가득했던 이순신에게 인간적인 고뇌와 회한의 그늘을 깊게 드리웠다. 실례로 1593년 6월10일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은 당시 경상우수사인 원균에 대해 “그 흉악하고 음험하고 시기하는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다”며 울분을 가감없이 적고 있다. 무능한 조정에선 이순신이 전공(戰功)을 장계로 올려보내면, 수급(首級)의 개수와 격파한 적선의 개수를 두고 임금을 기만한다며 치죄를 주청해 이순신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난중일기는 전쟁문학의 백미로 꼽힌다. 어려서부터 유교경전을 익히는 등 문인의 소양을 쌓은 이순신은 문무(文武)를 겸비한 장수로서 용맹과 별개로 인간적인 섬세함과 감수성 또한 뛰어났다.

우수수 비바람 치는 이 밤에/ 맘이 초조하여 잠 못 이룰 적에/ 긴 한숨 거듭 짓노라니/ 눈물만이 자꾸 흐르네/ 배를 부린 몇 해의 계책은/ 다만 성군을 속인 것이 되었네/ 산하는 오히려 부끄러운 빛 띠고/ 물고기 날새들도 슬피 우누나...중원 회복한 제갈량이 그립고/ 적 몰아낸 곽자의 사모하네. <난중일기 中>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유허’ 이락사. 정작 충무공의 순국지인 관음포에는 기념비가 하나도 없어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한 이순신의 8대손인 이항권이 왕에게 건의하여 사당을 짓고 유허비를 세웠다.
‘관음포 이충무공 전몰유허’ 이락사. 정작 충무공의 순국지인 관음포에는 기념비가 하나도 없어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한 이순신의 8대손인 이항권이 왕에게 건의하여 사당을 짓고 유허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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