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유신정권, 권총 한 방에 무너져
자본주의 심장, 뉴욕에서 조국의 미래를 보다
국가로부터 받은 혜택 절반이라도 돌려줘야
미국의 힘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과 ‘다양성’

㈜쌍용 미국 주재원으로 나가있을 당시인 1988년 미국 롱비치 항에 입항한 쌍용 시멘트 수출선에 올라 하역작업을 주관하면서 동료와 포즈를 취한 정세균(왼쪽).
㈜쌍용 미국 주재원으로 나가있을 당시인 1988년 미국 롱비치 항에 입항한 쌍용 시멘트 수출선에 올라 하역작업을 주관하면서 동료와 포즈를 취한 정세균(왼쪽).

[중소기업투데이 박철의 기자] 정세균은 대학과 군대를 마치고 나니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한때 인권변호사나 기자를 꿈꾸었지만 포기한 지 오래. 유신시대는 그렇게 젊은이들의 꿈을 앗아갔다. 이런 이유로 청년들은 관계(官界)진출을 꺼려했다. 정세균은 고심 끝에 1978년 종합상사인 ㈜쌍용에 입사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수출만이 살길이다’를 외치며 강력한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전개하던 시절이다. 1977년 수출 100억불, 국민소득 1000불을 달성하면서 그야말로 대한민국은 축제 분위기였다. 그것도 당초 목표를 4년 앞당겨 이룩한 쾌거였다. 당시 수출은 만병통치약쯤으로 여겨지던 시절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정세균은 외화를 벌어들이는 것도 ‘애국’이라는 생각을 하고 밤낮으로 일했다. 근면한 노동과 헌신이 자신의 성공은 물론 나라를 일으켜 세운다는 보람이 앞서던 시절이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박정희의 수출드라이브 정책은 유신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희석시키기 위한 수단도 깔려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를 거부할 사회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하루 세끼 밥 먹는 것조차 버거운 시대였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의 종합상사는 ‘에스키모에게 냉장고를 판다’는 불굴의 마인드로 ‘가발에서부터 탱크까지’라는 구호가 일상인 분위기였다. 정세균도 입사 후 시멘트에서 시작해 기계부품, 신발 등 다양한 품목을 영업하며 외화를 벌어들이는 수출역군으로서 국제영업의 최일선에서 뛰었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았던 박정희의 권력은 정세균이 종합상사에 입사한지 1년 만에 김재규의 총탄에 의해 무너졌다. 정치지망생 정세균은 국내에 안주할 수 없었다. 보다 넓은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치열한 사내경쟁을 뚫고 입사 4년 만인 1982년 미국 주재원으로 나갔다. 당시 주재원은 회사에서 해외유학비까지 지원했기 때문에 누구나 한번쯤 꿈꾸던 자리였다.

“80년대 초 민주화 운동이 한창일 때 저는 미국 주재원으로 나가 우리나라 물건 파는 일을 열심히 했죠. 그때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3번째로 외채가 많았어요. 외채 망국론까지 있을 때여서 어떻게든지 물건을 하나 더 파는 일이 애국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이 시기에 정세균은 암울하던 청년시절을 뒤로 하고 세계사적 흐름을 짚어보는 기회로 활용하기 위해 적지않은 발품을 팔았다.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 그 역동성과 다양성, 풍요와 화려함이 어우러진 뉴욕에서 세계를 상대로 세일즈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찬 일이었다. 하지만 가슴앓이도 했다. 세계 유수의 기업을 방문하면서 수없이 문전박대를 당했다. 정세균이 들고 간 한국 제품을 외국의 바이어들은 후진국에서 만들었다는 이유로 거들떠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국가브랜드’의 중요성을 절감한 정세균은 세일즈맨으로 고된 삶을 살면서도 뉴욕대에서 행정학을 공부하고 LA에서는 페퍼다인 대학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취득하는 등 자신을 부단히 연마하는 노력을 했다.

그러나 주재원 생활을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내심 불편함이 없지 않았다. 민주화 열사의 희생을 뒤로 하고 마치 자신만이 미국으로 도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늘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는 회고다. 귀국한 이후에는 경희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쌍용 미국 주재원 시절인 1988년 04월25일 쌍용 LA지사 사무실 건축 기념식에서 참석자들과 기념촬영을 한 정세균(뒷줄 왼쪽에서 네번째).
㈜쌍용 미국 주재원 시절인 1988년 04월25일 쌍용 LA지사 사무실 건축 기념식에서 참석자들과 기념촬영을 한 정세균(뒷줄 왼쪽에서 네번째).

10년 가까이 미국생활을 하면서 정세균은 미국의 정치와 사회를 소상하게 들여다보게 됐고 특히 자본주의 중심국가에서 생생한 실물경제를 배울 수 있었다. 한편으로 미국은 세계 최고의 마약소비, 심각한 빈부격차와 인종갈등 등 금방이라도 망할 것 같은 나라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미국은 세계 1등 국가로 굳건히 자리를 잡고 있다. 정세균은 이런 미국의 힘은 기부문화에서 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 온 국민의 호주머니에서 나오는 쌈짓돈이 미국 사회를 버티게 하는 힘이라는 것을 인지한 것이다. 미국 기부금 전체에서 쌈짓돈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략 70%인 반면 한국은 30%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한국의 기부문화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정책을 고민해야 할 때이기도 하다.

열린사회의 대부로 칭송받는 조지소로스는 미국을 넘어 세계를 변화시키는데 일조했던 인물이다. 소로스는 자신이 번 돈으로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등지의 헝가리 반체제 세력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공산주의로 물든 동구권 국가들을 해방시키는데 촉매제 역할을 했다. 한 사람으로 시작된 기부의 힘이 얼마나 큰지 가늠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정세균은 이런 세계사적 변화의 흐름을 누구보다 먼저 감지했던 것이다.

미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체감한 정세균은 누구든 자신이 받은 혜택의 절반만이라도 국가와 사회에 반드시 돌려주는 문화를 만드는게 자신의 소망이라고 했다. 정세균이 장학재단을 만든 것에는 이런 미국의 정신을 조금이나마 우리사회에 뿌리 내리게 하기 위한 속내가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작권자 © 중소기업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