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낮추었을 때 대화와 타협 이룰 수 있어
사회적 갈등 해소를 위한 ‘목요대화’ 개설
현장중시 정치인...편지로 소통의 폭 넓혀

'목요대화'는 정세균의 소통의지를 반영한 대표적인 사례다. 총리관저에서 전문가들을 초빙해 목요대화를 열고 있는 정세균 전 총리.
'목요대화'는 정세균의 소통의지를 반영한 대표적인 사례다.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전문가들을 초빙해 목요대화를 열고 있는 정세균 전 총리.

[중소기업투데이 박철의 기자] 정치인을 두고 강물이나 바다 위에 떠있는 배에 비유한다. 국민의 삶이 넉넉하고 평화로울 때 강물이라는 민심은 물위의 배를 띄우지만, 그렇지 못하면 파도를 일으켜 급기야 배를 침몰시키는 두려운 힘을 발휘한다. 지도자는 물론 기업의 CEO들에게 ‘강물처럼 자신을 낮추라’고 조언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세균은 대통령을 제외하고 국회의원과 장관, 총리, 국회의장을 했지만 늘 자신의 이름을 내세운 적이 없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자세를 낮춰 상대의 눈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눈다. 정세균을 그래서 강물에 비유하곤 한다.

“먼 길을 가는 사람의 발걸음은 강물 같아야 한다. 강물은 앞서려고 다투지 않으면서 부딪치는 모든 것을 배우고 만나는 모든 것들과 소통하며 끊임없이 변화한다.”

한 때 법학도의 길을 걸은 정세균은 신영복 교수의 이 말을 늘 가슴에 담고 있다고 한다.

15년 전 카이스트에서 법학을 가르치던 한 노 교수는 신입생들에게 느닷없이 ‘법(法)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20여명의 대학원생들은 주위를 두리번거릴 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한참 만에 노 교수는 칠판위에 ‘水+去=法’이라고 풀어서 썼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이 가는 길이 바로 ‘법’이라는 것이다. 국가의 틀을 유지하기 위해 만든 법은 국민을 규제하거나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상식에 반하지 않는 그런 법, 즉 작은 물방울이 모여 도랑을 거쳐 냇가로 모이게 하고 이어서 강과 바다로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 있도록 물길을 만들어 주는 것이 국민을 위한 법이라는 노 교수의 설명이다.

정세균은 총리에 취임하자마자 이런 물길을 만들기 위해 ‘목요대화’를 열었다. 그는 “총리에 취임하기 이전부터 사회적 갈등 해결을 위한 대화모델을 구상해 왔다”며 “각계각층의 대표들을 모시고 격의 없는 만남과 진정성 있는 소통으로 협치를 이뤄내고 갈등 해결의 계기를 만들자”는 취지라고 했다. 스스로 몸을 낮추었을 때 물길이 만들어지고 대화와 타협이라는 산물도 이뤄낸다. ‘목요대화’는 스웨덴의 타게 에를란데르 총리가 매주 목요일 스톡홀름에서 2시간 거리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서 정‧재계, 노조 등 각계 지도자들을 초대해 저녁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대화와 상생의 모델이다.

정세균은 목요대화를 열기 이전부터 타게 에를란데르의 삶에 대해 깊이있는 공부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은 ‘목요대화’에 참석해 “경청의 아이콘이고, 인내가 대단하다. 화를 잘 안내는데 그런 건 정말 배울 점”이라며 정세균을 극찬한 바 있다. 다음은 정세균이 감명깊게 읽었다는 <급진주의>라는 책의 한 구절이다.

“조직가에게 타협은 핵심적이고 아름다운 단어이다. 타협은 언제나 실질적인 활동 속에 존재한다. 타협은 거래를 하는 것이다. 거래는 절대적으로 숨고르기, 보통의 승리를 의미하며 타협은 그것을 획득하는 것이다.”

소통에는 다양한 방식이 있다. 자신의 성격과 스타일에 맞춰 대중과의 접점을 넓힌다. 정세균은 정치를 하기 훨씬 이전부터 편지를 통한 소통을 중요시했다. 무진장(무주, 진안, 장수)에서 지역구 국회의원을 할 당시, 유권자들을 만나고 돌아와서 꼭 그날의 생각들을 정리해서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보좌관들에게도 늘 현장에서 유권자들을 만나라고 강권해 보좌관들이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후문이다. 정세균은 9년간의 미국 주재원 생활을 할 때 단 한해도 거르지 않고 회사에서 지급되는 달력을 지역구 주민들에게 보내면서 서신을 동봉했다는 게 신흥고등학교 동기인 송완용의 증언이다.

정세균은 늘 현장을 고집하는 정치인 중의 한 사람이다. 종로에서 지역주민 3명이상 모인자리에는 늘 정세균이 있다고 할 정도로 스킨십이 강하고 주민들을 만나 대화하기를 좋아한다. 시간과 노력이 많이 필요한 일이기도 하지만 유권자로부터 선택받기를 원하는 정치인은 당연히 주민들과 소통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지역구가 종로인 관계로 정세균이 광화문광장의 세월호 천막을 자주 지나다닐 때다, 문득 차를 세우고 유가족과 단식농성중인 사람들과 손을 잡고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다 조용히 사라지곤 했다. 수행원이 사진 한 컷이라도 남기려고 하면 손짓으로 사양하며 물리곤 했다는 게 수행원의 전언이다.

 

타게 에를란데르 총리의 목요대화

1946년부터 23년간 스웨덴 총리를 지낸 타게 에를란데르 총리. 지방 교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스웨덴 남부 룬드 대학교에서 정치학과 경제학을 공부했다. 세계 대공항의 어두운 시대인 1932년 처음 의회의원이 되고 스웨덴 부흥의 틀을 만든 한손 총리가 심장마비로 급작스럽게 사망하면서 1946년 45세의 나이에 갑작스럽게 스웨덴 총리에 올랐다. 당시 스웨덴은 한국처럼 대기업 중심의 수출위주 경제체제로 인해 노사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기였다. 당시 에를란데르 총리는 각종 기념행사와 포럼, 회의 등에서 여러 단체의 대표를 만나 대화를 시도했지만 그때 뿐이었다. 1년에 한두 차례 기업총수와 노동조합 대표를 만나기도 했지만 성과는 없었다. 단체마다 정부가 수용할 수 없는 정책을 요구할 때가 많았고 이럴 때 마다 정권을 흔들었다. 그렇게 첫 임기를 마친 그는 1948년 선거에서 승리하자 갈등과 분열을 해소하고 정책에 대한 결실을 맺는 본격적인 대화의 장을 위한 ‘목요클럽’을 조직했다. 2주에 한 번씩 재무장관을 앞세워 경제인, 농업인, 도매인, 중소기업인 등 단체 대표를 초청해 목요대화를 열었다. 주요 경제정책과 현안을 두고 논의를 이어갔으며 참석자는 물론 총리 자신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50년대 중반, 정부와 대기업의 관계가 악화되자 목요클럽도 시들해지고 총리가 직접 주도하는 ‘하프순드’회의를 시작했다. 당시 총리는 별도의 관저가 없었다. 그러던 터에 스웨덴의 한 갑부가 스톡홀름 인근의 하프순드에 있는 자신의 영지를 에를란데르에게 기부하자 여기서 목요대화를 재개한 것이다.

에를란데르는 “정치권력을 대표하는 사람은 경제 권력을 가진 이들과 끊임없이 직접 대화해야 한다”며 재임기간 보여주기식 대화가 아니라, 상대의 의견을 경청하고 문제해결을 위한 노력을 부단히 했다. 그 결과, 재임기간 국가경제를 안정적으로 발전시켜 스웨덴을 유럽에서 가장 높은 소득을 창출하는 나라 중의 하나로 만들었고, 특유의 중재력과 실용주의 노선으로 좌우의 균형감을 유지하며 경제번영과 사회안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성공했다. 그는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는 정치인으로 최고의 권력자 자리에 올랐지만 청빈한 삶을 살았다. 총리시절, 관저 대신 임대주택에서 월세를 살았고, 출퇴근도 관용차 대신 자신의 아내가 직접 운전하는 차를 이용했다고 한다. 1968년 총리를 그만 둔 뒤 거처할 집이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당원들이 급하게 돈을 모아 집을 마련했다는 일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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