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정국에서 학생회 활동 극히 제한
긴급조치로 언론재갈..기자의 길 포기
“차돌이 되어 바위를 깨리라”며 훗날 도모

고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돼 축하꽃다발을 받는 정세균.
1974년 고려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돼 축하꽃다발을 받는 정세균.

[중소기업투데이 박철의 기자] 학보사 기자도 잘린 상황에서 법관의 길까지 포기한 정세균은 이때부터 반독재운동을 하는 친구들과 어울렸다. 독재정권하에서 대학생활은 점점 절망의 숲으로 빨려 들어갔다. 출구전략이 필요했다. 1974년 정세균은 고려대 총학생회장에 출마한다. 최소한의 자금도 조직력도 없는 깡촌 출신의 정세균이 당선되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 만큼이나 가능성이 없어보였다. 그가 지닌 자산이라곤 건강한 몸뚱아리와 지금껏 학교생활을 하면서 동료들에게 보여준 성실함이 전부였다. 정세균은 고심 끝에 ‘친진보 탈보수’를 선거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다. 어린 시절 웅변으로 다져진 언변을 무기로 유권자들을 접촉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 예상을 뒤엎고 정세균은 고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되는 기염을 토했다. 고대 총학생회장이라면 국회의원 배지는 미리 따논 당상인지도 모를 일. 고대 동기생인 한 친구는 정세균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사람을 끌어당기고 포용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보니 늘 주위에 사람이 모여 들어요. 늘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보다 남의 말에 먼저 귀를 기울이는 스타일로 상대의 생각이나 가치를 먼저 존중하고 배려합니다. 한마디로 덕장(德將)다운 면모가 있지요. 정치적인 논쟁 속에서도 싫은 소리를 하거나 화를 내는 모습을 본적이 없지 않습니까.”

고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됐다는 기쁨도 잠시, 정세균의 심사는 복잡하기 이를데 없었다. 계엄정권 하에서 총학생회가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 학교 정문에는 늘 군인들이 중무장한 채 탱크로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여차하면 탱크로 대학을 덮치겠다는 심산이었다. 학생운동의 기미만 살짝 보여도 당국에 끌려가 고진 고문를 당하고 구속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아니나 다를까, 당시 총학생회 총무부장인 송인회가 가장 먼저 잡혀갔다. 싸늘한 철창 속에서 민주인사들이 고문을 당하고 죽어가던 시절, 친구 송인회도 갖은 고문과 협박에 처해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정세균은 피가 거꾸로 솟았다. 살아남은 자의 아픔과 슬픔이 바로 이런 기분이 아닌가 싶었다. 정세균은 친구에게 면회를 갔다. 그러나 송인회는 오히려 “대책 없이 나서지 말고 사회에 나가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라”고 주문했다. 송인회가 던진 애정어린 충고가 엄숙한 명령처럼 다가왔다는 게 정세균의 회고다.

고대 총학생회장 시절의 정세균.
고대 총학생회장 시절의 정세균

이후 총학생회 운영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왔다. 소위 핵심인사들이 구속되거나 일부는 도피하는 신세가 돼 조직의 역량을 발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학생회가 한줌의 재가 될 때까지 싸우면서 산화를 할 것인가, 아니면 최소한의 자치기구를 유지하면서 훗날을 도모할 것이냐를 놓고 심한 갈등을 겪었다.

정세균은 “바위에 부딪혀 깨지는 계란이 되기보다 차돌이 되어 저 바위를 깨리라” 다짐하고 후자를 선택했다. 동지들에게 면목이 없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만 반드시 동지들에게 빚을 갚겠다고 맹세를 한다.

“1974년은 박정희 유신독재가 긴급조치 1호를 선포해 시인 김지하가 <1974년 1월>이란 시에서 ‘1974년 1월 죽음이라 부르자, 오후의 거리, 방송을 듣고 사라지던 네 눈 속의 빛을 죽음이라 부르자’고 했던 우리 역사에서 가장 암울했던 한 시기였기에 대학의 학생회장이라 하더라도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활동을 적극 펼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무렵 많은 대학생들이 연행되거나 구속되었고 데모도 끊이지 않아 학생회도 투쟁방향을 놓고 고민이 많았을 것임은 자명하다.” (폴리뉴스 보도 ‘정세균의 삶과 정치’中)

어렵게 대학에 입학해 어렵게 대학을 졸업한 정세균은 당시 민족정론을 표방한 동아일보기자를 하고 싶었지만 이마저도 포기했다. 긴급조치로 언론도 재갈이 물려 있어 기자노릇마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신정권은 기업체 광고주들을 불러 동아일보에 광고를 내지 말라고 압력을 넣는 등 치졸하기 짝이 없는 행동을 일삼았다. 1974년 12월 26일자 동아일보 4면과 5면 하단의 광고란이 텅 빈채 발행이 되는 언론사상 유례가 없는 ‘백지광고 사태’가 그것이다. 당시 국민들은 격려광고로 동아일보를 응원했다. 정세균도 친구들과 십시일반 뜻을 모아 백지광고에 동참했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 110여명이 강제해고 됐다.

정세균은 대학을 졸업하고 전주에 있는 육군 35사단에서 신병교육을 받은 뒤 수도경비사령부로 전출됐다. 여기서 그가 맡은 보직은 학원사찰이었다. 고려대 학생회장을 하면서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을 전개한 그로서는 이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는 “동료 학우를 사찰하는 보직을 수용하느니 차라리 영창을 가겠다며 버티었다”며 “그러다보니 안동 36사단 정훈병으로 전출을 가게 됐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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