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정권하에서 헌법 책 눈에 들어오지 않아
광주천막촌 시위대 ‘반공법’ 혐의 씌워 구속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 실감

고려대 재학시절의 정세균
고려대 재학시절의 정세균(맨 왼쪽)

[중소기업투데이 박철의 기자] 정세균은 신흥고등학교로 전학을 와서 2년가량 빵돌이 생활을 통해 용돈을 벌며 학교를 졸업했다. 친구들이 빵돌이라고 놀려댔지만 그것이라도 감지덕지였다. 당시 수업료를 제때 내지 못하는 학생들이 부지기수였던 시절 빵돌이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자리가 아니었다.

“사춘기 시절 매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자존심 등 뭐 이런 거지요. 특히 제가 뻔뻔한 스타일이 못된다는 점에서도 그렇고..하지만 그런 약점도 훈련을 통해 극복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만으로 큰 위안이 됐습니다.”

정세균은 3학년 때 전액 성적우수 장학금을 받게 되면서 빵돌이 생활을 청산할 수 있었다. 당시 신흥학원에서 고등학교는 정세균이, 중학교는 서거석 전 전북대 총장이 빵돌이로 대표되는 학생들이었다. 정세균은 신흥고 3학년 때 문과에서 전교 1등을 유지했다. 하지만 서울법대에 2번이나 지원했으나 모두 불합격했다. 시골에서 최고의 우등생이던 정세균이 학교생활에서 경험한 최초의 쓴 맛이었다.

그는 결국 1971년 고려대 법대에 입학했고 종로 팔판동에서 입주과외를 하면서 먹고 자는 것을 해결했다. 그러나 유신의 어두운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상태에서 대학생활 자체가 무료하고 답답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학보사 기자다. 정세균은 국내 주요 일간지를 보고 동료기자들과 토론을 하면서 정리된 내용을 학보와 대자보에 싣는 역할을 주로 했다. 틈나는대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섭렵했다. 책을 통해 인생의 스승들을 만나면서 삶의 지혜도 터득했다. 책에는 희망의 길이 보이고 영혼을 살찌우는 향기가 들어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런 독서의 힘을 기초로 현장을 누비고 밤을 지새우며 대학기자 생활을 했다. 그러나 그 마저도 오래할 수 없었다. 학보사 주간이 쓰지 말라는 기사를 썼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다고 주저앉을 정세균이 아니었다. 봉산개도 우수가교(蓬山開道 遇水架橋), ‘산을 만나면 길을 내고, 물을 만나면 다리를 놓겠다’는 의지로 사법고시에 도전장을 냈다.

이듬 해 여름, 정세균은 도서관에서 더위와 싸우며 사법시험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경기도 광주(지금의 성남시)에서 폭동이 일어났다는 신문기사를 보게 된다. 헌법 책이 눈에 보일 리 만무했다. 기자정신을 발휘해 친구들 몇몇과 함께 버스를 몇 번 갈아타고 광주의 현장에 도착했다. 버스가 비포장도로를 달리다보니 반나절이 걸렸다. ‘광주대단지’라는 허허벌판에는 어림잡아 수 천 여개의 천막이 펼쳐져 있었다. 한 개 천막에 8가구가 살았고 30개 천막에 화장실이 하나씩 달려 있었다. 아침이면 화장실을 가기 위해 전쟁을 치르다시피 했다. 궁핍은 도를 넘었다. 당시 어떤 아낙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삶아 먹었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나돌았다. 광주대단지가 만들어진 배경은 이렇다.

고려대 재학시절 학우들과 함께 한 기념사진. 앞줄 가운데가 정세균.
고려대 재학시절 학우들과 함께 한 기념사진. 앞줄 가운데가 정세균.

박정희 정권은 1972년 5월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청계천과 용산 일대에 사는 빈민들의 이주 작전을 짰다. 서울시는 광주에 이주단지를 조성하는데 드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개발차익이라는 미끼를 이주민들에게 던졌다. 이에 빈민들은 개발이익에 대한 기대를 안고 자의반 타의반 광주로 터전을 옮겼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자 주민들에게 “전매 소유한 땅에 보름내로 건물을 짓지 않으면 토지불하를 취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이주민들은 단지에다 얼기설기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평당 1만원을 일시불로 납부하라는 통지서를 발급했다. 역시 기한은 보름이었다.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기 어려운 상황에서, 보름 만에 적지 않은 돈을 내라는 일종의 협박이 시작됐다. 급기야 성난 빈민들이 생계대책을 요구하며 몽둥이와 연장을 들고 성남 파출소와 경찰서를 습격하고 시영버스를 탈취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사태는 한나절 만에 수습이 됐지만 후유증은 적지 않았다. 경찰은 시위과정에서 20여명의 빈민들을 구속시키고 반공법 혐의를 씌워 갖은 고문을 자행했다. 이것도 모자라 상습폭동 유발자, 정신 이상자 등으로 조서를 날조해 수감을 시키기까지 했다.

정세균은 두, 세 차례 경찰서에 가서 상황을 체크한 뒤 구속된 빈민들의 가족들을 만났지만 이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자괴감만 안고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당시 광주사건의 실상을 알리던 친구들은 간첩으로 몰려 구속되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벌어졌다. 정세균은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말이 실감났다고 회고했다. 그러던 터에 고향친구인 임실 출신의 심학무가 찾아왔다.

“세균아, 너 한태연, 갈봉근 같은 이가 만든 헌법 책으로 공부하고 시험 볼거냐.”

두 사람은 유신헌법을 만든 교수들이다. 정세균은 달리 변명할 말이 없었다. 이들은 유신헌법을 선전하러 전국을 순회하고 있었다. 정세균은 한동섭 교수에게 한 학기 헌법학을 배웠다. 앞서 한 교수는 박정희의 3선 연임에 반대하는 논설을 신문사에 기고했다가 고초를 겪은 바 있다. 그러던 한 교수가 이번에는 유신헌법을 작성하라는 정권의 요구에 불응하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한 교수는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을 하다가 한 참 만에 교정으로 다시 돌아왔다. 정세균은 우연히 교정에서 한 교수와 마주쳤다. 그러나 차마 얼굴을 쳐다 볼 수가 없었다. 유신의 어두운 그림자는 그렇게 학원가를 덮치고 있었다. 결국 정세균은 그토록 원하던 법관의 길을 포기한다. 1972년 11월21일 국민투표로 확정된 유신헌법은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으로서 무소불위 독재국가의 서막이 시작된다. 이후 7년만인 1979년 박정희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쓰러진다. 한 교수는 정세균이 군복무시절 비교적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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