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均’은 고무래(丁)통해 공평한 세상 만들라는 뜻
다산의 ‘실학’과 ‘실용’은 정세균의 정신적 지주
장관시절, ‘3천억달러의 사나이’ 애칭 얻기도

2006년 정세균 총리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시절, 수출 3000억 달러를 달성하자 세간에선 그를 ‘3000억 달러의 사나이’로 불렀다.
2006년 정세균 총리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시절, 수출 3000억 달러를 달성하자 세간에선 그를 ‘3000억 달러의 사나이’로 불렀다.

[중소기업투데이 박철의 기자] 정세균이 2020년 총리로 낙점된 뒤 국회에서 청문회가 열렸다. 이날 “가장 존경하는 역사적 인물이 누구냐”는 한 국회의원의 질의에 그는 “다산(茶山) 정약용 선생과 백범(白凡) 김구 선생”이라고 대답했다. 다산이 저술한 ‘목민심서’는 목민관, 즉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한 저서로, 오늘날 정치인, 기업인, 공무원 등이 지켜야 할 공무 지침서로 알려져있다. 독립운동가인 김구 선생은 어떤 이념이나 사상보다 겨레와 동포를 최우선 가치로 삼은 한국현대사의 거목이다. 그의 좌우명은 음수사원(飮水思源). 물을 마실 때 그 물이 어디에서 왔는지 생각하라는 뜻으로 근원을 잊지말라는 의미다. 김구 선생이 1919년 상해임시정부의 조각이 시작되자 도산 안창호를 찾아가 “임시정부의 문지기가 되게 해 달라”고 청했다는 일화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국민을 섬기고자 하는 그의 진솔함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창호는 그를 경무국장으로 발탁했다. 김구 선생은 1949년 6월26일 서울 종로구 경교장에서 안두희 소위가 쏜 흉탄에 맞아 서거했다.

정세균의 할아버지는 한학에 정통한 유학자였다. 할아버지는 다산의 균민(均民)사상을 계승 실천하라는 의미로 손자의 이름을 ‘丁世均’으로 지었다고 한다. ‘세균’은 세상을 고르고 평등하게 가지런히 하라는 가르침이었다. 정약용의 정치관도 결국 ‘세균(世均)’이라는게 정세균의 생각이다.

이런 멋진 의미의 이름을 놓고 쑥덕공론을 하는 이들에게 정세균은 웃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 못 배운 사람과 배운 사람, 아픈 사람과 건강한 사람, 젊은이와 어른들이 한데 어울려 멋지고 신명나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 바로 ‘세균’이며, ‘균형’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최근 핫이슈인 ‘공정’ 내지는 ‘공평’의 의미와 비슷한 맥락이 이름 속에 담겨 있다.

2016년 서울 종로에서 20대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할 당시 SNS이용자들이 ‘세균맨’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자, 그는 선거유세차량의 이름을 아예 소독차로 명명해 현장을 누볐다. 이런 발상의 전환을 통해 당시 경쟁자였던 오세훈 후보를 물리쳤다.

정약용은 압해정(丁) 문중에서 가장 위대한 조선실학의 거두다. 압해정은 고무래정(丁)으로 불리기도 한다. 고무래는 가을에 곡식을 말릴 때 곡식을 펴 널거나 끌어 모을 때, 아궁이의 재를 치울 때도 마찬가지로 쓰인다. 정세균은 초등학교 때는 물론, 검정고시 공부를 하면서도 이런 정약용의 실학정신과 실용주의를 배우면서 다산이 자신의 조상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졌다고 한다.

정세균 총리가 가장 존경하는 역사적 인물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다. 사진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에 위치한 정약용 생가.
정세균 총리가 가장 존경하는 역사적 인물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다. 사진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에 위치한 정약용 생가.

어린 나이지만 정세균은 다산이 정치적인 이유로 전남 강진에서 17년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목민심서(牧民心書)’, ‘경세유표(經世遺表)’등 800권이 넘는 저술을 통해 철학과 사상 뿐 아니라 과학, 지리, 건축, 법률,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눈부신 학문적 성과를 거둔 사실에 무한한 존경과 애틋함을 가졌다고 회고한 바 있다.

다산에게 가장 돋보이는 대목은 개혁사상이다. 다산은 조선 후기를 털끝 하나까지 부패한 사회로 진단하고, 군주에 대한 충(忠)만을 강조하던 성리학적 지배 질서로는 당시의 혼란을 수습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대신 유학(儒學)의 근본으로 돌아가 유교 경전을 다시 해석했다. 그리고 그 참뜻을 살려 민본(民本)과 위민(爲民) 정치로 당시의 사회질서를 바로잡고자 했다. 정세균은 다산 같은 어른이 제대로 대접을 받았다면 우리나라가 식민지가 되지 않았을 것이고, 백성들의 삶 또한 곤궁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6년 정세균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부임 후 첫 번째 작업으로 그는 각 회의실마다 실학자들의 호를 써서 붙이게 했다. 다산(정약용)실, 연암(박지원)실, 담헌(홍대용)실 같은 식이다. 세계시장을 상대로 물건을 팔고 살아야 하는 대한민국 경제부처의 수장으로서, 무엇보다 정약용의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산업정책에 반영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실용주의 정책을 통해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시절, 수출 3000억 달러를 달성하자 세간에서는 그에게 ‘3000억 달러의 사나이’라는 별칭을 붙이기도 했다.

정세균은 특히 다산의 목민심서에 나오는 ‘위방 재어용인(爲邦 在於用人)’이란 구절을 자신의 인생잠언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사람을 쓰는데 달려 있다는 뜻이다. 이렇듯 정세균은 실용과 함께 성실한 사람을 곁에 두는 용인술을 쓴다. 실례로 이재명 경기지사가 민주당 당직자 시절, 주말에도 혼자 나와 일하는 모습을 보고 성남시장 선거 후보에 적극 추천했다는 후문이다. 통상 공무원들은 자신이 속한 조직에 어떤 이익이 돌아오며 해가 무엇인지를 먼저 따진다. 부처별 밥그릇 싸움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고위직일수록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정세균이 장관 시절, 함께 일했다는 K씨는 이렇게 전한다.

“방금 oo국장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저는 장관이자 국무위원으로 이 자리에 있다. 이에 부처의 이익을 우선하는 oo국장의 말씀을 수용할 수 없으니 이해바란다.”

정세균은 늘 부처의 개별적 이해보다 국가의 미래를 먼저 고민했다는 A씨의 설명이다. 20년 전 정세균은 이미 ICT, 바이오산업 등 4차 산업혁명을 통한 미래의 먹거리까지 염두한 정책을 만들었다. 이런 안목은 정세균이 미국에서 10년간 상사맨으로 활동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게 A씨의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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