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만 객원 편집위원(한서대 교수)

박경만 본지 편집위원
박경만 본지 편집위원

[중소기업투데이 박경만 편집위원] 4차산업혁명기엔 자칫 공동체 구성원의 소외와 격차가 더욱 심각해질 수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쓰디쓴 독백처럼, “고효율 자본주의라는 엔진이 만들어내는 쓰레기더미, 즉 빈곤과 빈곤한 사람들”을 양산할 수도 있다. 그런 맥락이라면 4차산업혁명은 ‘혁명’이라기보단, 인간 소외와 차별을 극대화하는 역사의 반동이 되기 쉽다. 그래서 등장한게 경쟁지상주의에 맞선 평등 지향의 대안들이다. 즉 보편적 분배, 비대칭 복지, 기본소득과 같은 것들이다. 이는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교조적 사회주의와도 다르고, ‘노력해서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것’만을 향유하라는 능력주의 내지 보수적 자본주의 강령과도 다른 것이다.

그럼에도 기본소득은 여전히 뜨거운 논쟁거리다. 유급 노동자들만 사회적 생산의 결과를 나눠 가질 권리가 있다는 신자유주의자들은 그 언급만으로도 당혹해 한다. 그러나 그런 당혹감은 ‘인간 모두의 삶이 풍요로워야 한다’는 정언명령으로 수렴되지 않는다는게 문제다. 물론 기본소득의 정당함이나 불가피성을 무조건 예단해선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기본이 안 된 사회를, 기본을 갖춘 세상으로 바꾸고자 하는 지혜와 고뇌의 산물인 것만은 분명하다.

사회적 공유자산의 수익을 공유한다는 발상도 기본소득과 궤를 같이 한다. 예를 들어 방송․통신 주파수 대역이나 그로부터 사물인터넷을 실어나르는 플랫폼은 공유의 것이다. 기본소득은 그런 것들을 공유한다는 철학과도 일치한다. 모든 시민은 모든 공유자원의 사용 이익을 나눠 가질 권리가 있고, 한 사회의 공유자원 일체가 보편적 기본소득의 원천인 것이다.

그럼에도 진영별로 기본소득의 텍스트에 대해 정반대라고 할 만큼 다른 해석을 가한다. 우파는 수많은 복지급여를 단순, 획일화하고, 예산과 관료조직을 축소하는 것으로 그 개념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한 마디로 작은 정부의 수단이다. 또한 부(負)의 소득세, 즉 우리네 기초생활수급제도처럼 국가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한 선별적 복지의 변형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여전히 소득과 연계되어 현행 경제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하며, 모순된 사회관계는 방치하는 ‘기술적 해결책’이란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반면 좌파를 비롯한 보편주의자들은 개인소득과는 무관하게 모든 사람의 기본적인 경제적 ‘허기’를 충족시키는데 의미를 둔다. 임금체계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복귀시키거나 편입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모두에게 최소한의 안정된 삶을 제공하려는 시도다. 이 역시 맹점은 있다. 역설적이게도 ‘기술적 실업’이 발생하기도 전에 선제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오히려 ‘기술적 실업’을 유도하기도 한다. 우파 진영에서 말하는, 이른바 모럴 해저드다.

허나 기본소득은 자본주의, 곧 자유, 영리, 사유의 적도 아니요, 그 안티테제도 아니다. 오히려 공동체의 안정을 통해 자본주의의 원활한 비행을 돕는 보조날개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물론 ‘물고기 낚는 법’을 먼저 가르치라는 우파적 소신도 틀리지 않다. 하지만 인간보다 기술이 우선되는 소외의 시대엔 자기 몫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사회적 어획물 자체를 나눠줄 좋은 방법을 찾아내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서 부와 출생에 뿌리를 두는 자연적 귀족, 혹은 능력과 천재성에 근거한 인위적 귀족, 그 어느 것에도 속하지 못한 평민들을 위한 공존의 공간이 허락되어야 한다. 이는 불평등의 경계 너머 인간존재의 재발견이며 존중의 길이기도 하다. 기술만능의 테크노피아를 목적에 둔 지금, 기본소득 논쟁이 나름의 존재감을 갖는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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