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래(丁)는 운명...검정고시는 꿈과 희망의 토양
수업료마저 낼 수 없었던 가난한 정세균
책가방 들지 못한 친구 위해 우회로 통학
롤러코스트 타며 난관 극복한 승부사 기질도

[중소기업투데이 박철의 기자] 20대 대통령 선거가 불과 1년 남짓 남았다. 이재명 경기지사와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양강 구도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반전의 기회를 노리는 정세균 국무총리의 행보가 예사롭지 않다. 기업인 출신으로 6선 국회의원, 산업부장관, 국회의장을 거쳐 현재 국무총리직을 수행하고 있는 정세균 총리의 어린 시절에 대해 궁금해 하는 독자가 적지 않다. 본지는 덕유산자락에서 태어나 중고교, 대학을 거쳐 쌍용에 입사하는 등 지금의 정 총리가 있기까지 가치관의 토대가 구축된 그의 젊은 날의 행보를 따라가 보았다.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두 차례에 걸쳐 ‘정세균의 휴먼스토리’를 총 14회에 걸쳐 연재한다. 정 총리 주변 인물 등을 대상으로 폭넓게 취재했다.

초등학교 2학년 시절의 정세균 총리.
초등학교 2학년 시절의 정세균 총리.

어려서부터 유난히 총기가 있었던 정세균은 취학 전에 이미 한글을 떼고 천자문을 읽을 정도로 천재소리를 들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는 당시 담임 선생님의 권유에 의해 4학년으로 월반을 했을 만큼 또래에 비해 학업이 출중했다. 그렇게 우수한 성적으로 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언감생심, 정세균은 상급학교 진학은 꿈조차 꿀 수가 없었다. 수업료를 낼 수 없을 만큼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이다. 결국, 정세균은 어머니와 함께 산으로 들어가 화전을 일구어야 했다. 가난을 탓하거나 세상을 원망할 만한 여유조차 없었다. 당시는 대다수가 그렇게 살았다. 화전은 야산에 불을 질러 타고 난 자리를 개간해 감자나 인삼 등을 심어 농사를 짓는 방법이다. 정세균은 그렇게 어른들도 감당하기 버거운 화전민 생활을 해야 했다.

당시 화전은 불치의 병을 얻어 생존가능성이 없거나 땅 한 떼기 없어 깊은 산속에 들어가 움막을 치고 사는 사람들이 선택한 생존의 마지막 수단이기도 했다. 종종 사상범들이 피신하면서 화전을 일구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어느날 정세균은 산에서 손수 해온 땔감을 아궁이에 넣고 불을 지피고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문득 자신이 불을 지피고 난 뒤 남은 재를 치우는 고무래 신세가 아닌가 하는 처량한 생각이 들었다. 어린 정세균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볼을 타고 내리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고무래정(丁)자를 쓰는 의성정씨로 태어난 것이 아닌가! 정세균은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고무래로 재를 긁어모아 낙서를 하거나 그림을 그리면서 자신을 위로했다. 고무래는 논이나 밭의 흙을 고르거나, 씨를 뿌린 뒤 흙을 덮을 때 또는 곡식을 모으거나 펴는 데 쓰는 연장으로 부엌의 재를 긁어내는데도 유용하게 쓰이는 도구다. 생각을 바꾼 것이다.

화전민 생활을 하던 정세균은 천신만고 끝에 꿈에도 그리던 중학교 진학을 할 수 있었다. 비정규 고등공민학교이지만 이마저도 없었다면 어떻게 됐겠는가. 폭우가 쏟아지거나 폭설이 내리면 종종 오도 가도 못하는 열악한 환경으로 일 년에 한 달은 학교에 나갈 수 없었지만 책가방을 둘러맬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격스러웠다.

하지만 드러내놓고 웃을 수만은 없었다. 친구들의 부러운 시선 때문이었다. 몇 개월 전만 해도 상급학교 진학을 못한채 함께 농사를 짓고 땔감을 하던 친구들의 시선이 부담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등‧하교 때는 친구들과 부딪치지 않으려고 우회로를 선택하기도 했다.

정세균은 2년 만에 검정고시에 합격, 고등학교 진학을 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하지만 학교 공부는 여기까지. 또 다시 지게를 지고 산으로 올라가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렇게 일 년을 산에서 보내다시피 했다. 어느 날 산에서 나무를 하다 말고 숲속에 누워있던 정세균에게 파란 하늘에 구름이 흘러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떠나는 구름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 듯 떠올랐다. 이대로 산골의 나무꾼으로 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객지로 돈 벌러 간 친구도 있었지만 정세균의 머릿속에는 오직 공부가 전부였다. 또 다시 아버지가 나섰다. 우여곡절 끝에 무주에 있는 안성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6개월 만에 중도 포기했다. 정세균의 기대와 달리 학습 분위기가 영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러다간 실력이 늘기는 커녕 오히려 떨어질 것 같은 걱정이 들었다. 결국 6개월 만에 그만 두고 전주공업고등학교로 진로를 바꿨다. 특히 “100% 취직이 되는 학교”라는 말에 그의 귀가 솔깃했다. 전주공업고등학교 입학시험에서 전교 8등이라는 성적표를 받은 정세균은 이후 줄곧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시골 촌놈 정세균의 실력이 도시에 사는 친구들과 비교해 결코 뒤쳐지지 않다는 사실에 자신감이 생겼고 학교 선생님도 서울공대로 진학해 훌륭한 공학도가 되라고 용기를 주었다. 그러나 쇠를 깎고 용접하는 수업이 적성에 맞지 않아 몇 달을 전전긍긍했다. 대학에 가려면 인문계 고등학교로 옮겨야 해 ‘집안에 돈이 없어도 갈 방법이 있지 않을까’ 별의별 생각을 다 해봤지만 묘수가 없었다. 그가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돌직구’ 밖에 없었다. 무작정 인문계 학교인 전주신흥고등학교 교장실 문을 두드렸다.

정세균은 “검정고시와의 인연이 없었다면 정치인의 꿈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고, 검정고시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내가 보다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토양이자 정치인의 꿈을 키우는 자양분이었다”는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국내 검정고시 출신들은 대략 180만명. 문주현 전국검정고시총동문회장(엠디엠 회장)은 “검정고시 출신들은 가난과 병마, 방황 등 예기치 않은 삶속에서 정규학교를 다니지 못한 아픔이 있었지만 그 아픔이 오히려 약이 되어 부족한 것은 채우고 노력했다”며 “이들은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로 인간승리를 이끌어낸 이 시대의 주인공들”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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