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만 객원 편집위원(한서대 교수)

박경만 본지 편집위원
박경만 본지 편집위원

‘공정’(fair)이라는 개념은 매우 논쟁적이고 주관적이다. ‘공정’의 다원적 규명을 시도하는 마이클 샐던이나, ‘능력주의’(meritocracy)를 비판하며 ‘인간 조건 자체가 운(運)’이라는 사회학자 마이클 영에 이르면 더욱 난해해진다. 이에 ‘경제’ 개념을 더한 ‘공정경제’로 확장할 경우엔 그 이념적 해석과 위상을 두고 새롭게 논란이 이어진다. 그러나 공정경제는 단순히 이념적이거나, 당위론적 진술을 넘어, 헌법적 가치의 기속력(羈束力. binding power)을 대동한 개념이다. 이른바 ‘경제민주화’ 규정으로 알려진 헌법 119조 2항은 ‘경제력 남용 방지’와 ‘경제 주체 간의 조화’를 위한 ‘규제와 조정’을 국가가 할 수 있다고 했다. 자유경제체제를 인정하되, 케인지언 류의 수정자본주의의 간여도 불사한다는 개념이다.

‘공정한’이란 말에는 ‘윤리적’(ethical)이란 뜻도 담겨 있다. 그래서 ‘공정경제’는 유사한 뜻을 지닌 다른 말인 ‘윤리경제’ 혹은 ‘대안경제’로 대체할 수도 있다. 이는 소규모 생산자나 사업자를 소외시키는 거래, 혹은 착취나 자원 낭비에 근거한 국제무역에 대한 대안을 제공한다는 뜻도 된다. 중간상인을 배제한 윤리적인 직접 거래(무역)도 그에 속하고, 대안의 유통채널, 공정노동(아동 착취 금지) 등의 윤리적 경제행위 또한 그렇다. 이런 ‘공정’한 ‘경제’에 대한 사회적 필요성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특히 최근에 불거진 일련의 산업 지형에선 그 절실함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프랜차이즈 본사의 ‘갑질’이나, 소상공인과 골목상권에 대한 대기업들의 약탈적 침해, 원청과 하청, 재하청의 착취구조, 독과점에 의한 소비자 권익과 효용의 반감 등이 그런 것들이다.

하긴 해묵은 19C말, 미국 ‘반트러스트법’이 제정될 때부터 공정경제에 대한 막연한 공감은 존재해왔다. 그러나 ‘반트러스트법’이 소기한 목적이 독과점 규제와 이로 인한 소비자 보호라는 소극적 반경에 머물렀던데 비해, 오늘의 공정경제는 좀더 적극적인 목표가치에 과녁을 맞추고 있다. 그 ‘목표가치’는 정부의 간섭, 자유 경쟁에 대한 규제와 침해를 탓하는 자유방임적 시장주의에 대한 해명의 로직(logic)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공정거래는 곧 시장실패에 대한 해결책이다. 자원의 왜곡과 노동시장의 불균형, 독점 자본 등 비정상적인 생산요소의 작동을 교정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이다. 이는 반시장적이긴 커녕, 시장의 실패를 교정함으로써 오히려 자본주의의 정상적 피드백을 가로막는 장애 요소를 제거하는, 21세기 버전의 자유주의 모델이라고 해야 옳다.

공정경제의 미덕은 분명하고 구체적인 사례로 나타난다. 우선 생산자, 판매자, 구매자에게 좀 더 평등하게 서비스, 용역을 제공하는 공급체계를 가능하게 한다. 소상공인과 영세 자영업자, 소기업이 거대한 시장 경제 장기판에서 최소한의 생존을 담보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약탈적이며 폭력적인 상행위와 상거래가 배제되고, 경제적 약자들이 경제주체로 등업됨으로써 건강하고 지속 가능한 경제적 생태계가 구축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공정경제의 가장 큰 수확은 소비자의 효용 극대화다. 투명하고 질좋은 생산과정과 공급체계가 보장됨으로써 소비자들도 양질의 생산품을 적정한 가격에 제공받을 수 있다. 더 공정한 선택의 기회를 갖게 되고, 최소 비용으로 최대의 효용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이다. 소비자들 역시 각성의 주체가 되어, 한층 도덕적이며 공정한 소비를 통해 생산과 유통, 소비, 투자를 견인하고 촉발할 수 있다. “공정거래는 소비자가 이끌되, ‘윤리적’인 소비의 성장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경제학자 알렉스 니콜스 등의 희망사항이 현실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결국 공정경제는 만인에 의한 만인의 행복을 위한 ‘룰(rule)’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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