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천년 기업이 뿌리내리는 토양, 이탈리아
[기고] 천년 기업이 뿌리내리는 토양, 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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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섭 한국중소기업학회 부회장, 한국경영학회 부회장
서울벤처대학원대학교 융합산업학과 교수
윤병섭 한국중소기업학회 부회장
윤병섭 한국중소기업학회 부회장

이탈리아 장수기업의 비결

1000년 이상을 이어오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10개 가족기업 중 6개가 이탈리아에 있다. 이탈리아 전체기업의 72%는 가족이 지배권을 행사한다.

이탈리아에 오랜 가족기업이 많은 이유는 직업을 대대로 이어오는 전통이 있고, 업종 교체를 선대에 대한 존경심을 버리는 것으로 죄악시하기 때문이다.

1000년에 세워진 종(種) 제조회사 ‘폰데리아 폰티피시아 마리넬리’, 와인을 생산하는 ‘바론 리카솔리’(1141년), 유리조명 제품생산 기업 ‘바로비에르 앤 토소’(1295년), 귀금속 제조공방 ‘토리니 피렌체’(1369년), 와인 양조회사 ‘지오반니 디 피에로 안티노리’(1385년), 도자기회사 ‘그라치아 데루타’(1500년), 주물제작소 ‘콜바키니’(1745년) 등 한둘이 아니다.

이탈리아 가족기업은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가족 고유의 문화를 전통으로 잇고 한 우물을 파는 꾸준함과 성실함으로 도전에 대비해 경계하고 흔들리지 않은 원칙을 지키고 있다. 로마는 승리해 개선하는 장군을 환영하는 시민의 함성 속에서 교만하지 않도록 개선장군의 뒷자리에 노예 소리꾼을 앉혀놓고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반복해 외치게 했다. 여기에는 또 닥치는 전쟁에서 패배와 죽음에 이를지도 모르니 이를 대비해 경계하고 겸손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중국 제왕학(帝王學) ‘정관정요(貞觀政要)’를 보면 당나라 태종 이세민에게 위징이 “창업은 쉽고 수성이 어렵다(創業易守成難)”는 말을 한다. 기업이 뛰어난 기술이나 유행을 앞서는 브랜드로 시장에 뛰어들더라도 곧 쇠퇴하므로 지속 성장하는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날이 갈수록 새로워야 한다는 혁신과 도전의 개척정신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다.

교황청과 교회의 종(bell)을 전문제작하기 위해 1000년도에 문을 연 세계에서 가장 오랜 주물기업 ‘폰데리아 폰티피시아 마리넬리(Pontificia Fonderia Marinelli)’는 철저한 후계자 교육으로 장인정신을 1020년 이어온 가족기업이다. 주조소가 마리넬리 가문의 후손에게 학습장이자 놀이터다.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회사에서 놀면서 제품이 개발되고 만들어지는 광경, 아버지가 직원들과 열정적으로 일하고 고객을 상대하는 일상의 모습을 본다. 회사의 역사와 선조의 스토리를 들으면서 과거를 알고 아버지가 일생을 바쳐온 일과 열정으로부터 현재를 이해하면서 미래에 대한 믿음을 키운다. 어린시절부터 자연스럽게 가업의 자부심과 대를 이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지니고 있다.

명품유리 조명제품을 생산하는 ‘바로비에르 앤 토소(Barovier & Toso)’는 1295년 설립해 유리 용광로의 화재와 기술유출 우려를 덜 수 있는 무라노섬에서 돈이 아니라 열정과 비전을 물려줘 세계에서 다섯 번째 장수기업 가문을 전승하는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전통에 입각한 독자적인 공예기술을 전승하며 새로운 제작기술로 신천지를 개척했다. 고통스럽고 힘든 혁신의 과정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는 독수리처럼, 늙은 기업을 혁신으로 끊임없이 굳은 껍질을 벗어던져 새살이 돋게 함으로써 젊음을 유지한다.

이탈리아 장인들은 매뉴얼화할 수 없는 암묵지를 중시하고 기본에 정성을 기울이며, 정교한 작업을 완전히 학습하도록 노력한다. 핵심역량 집중도를 높여 철저히 품질을 관리하고 유연한 전략으로 네트워크를 구축해 기업 명성을 꾸준히 끌어 올려 정상에 머무르게 한다. 구성원이 가치관과 비전을 공유하고 가족 사이 정보교환으로 개방형 의사소통이 가능한 환경을 조성해 일체감을 형성한다. 이탈리아 장수기업은 어린시절부터 교육을 통해 인적 자본과 사회적 자본을 자연스럽게 물려주고 있다. 기업이 대를 이어 존속하기 위해선 경제적 자본을 후계자에게 물려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개인의 지식과 기술, 열정, 비전, 직업관과 윤리의식 등 인적 자본과 가족 사이 신뢰, 회사 구성원 간 협력 등 사회적 자본을 중요시하고 있다.

이탈리아 가족기업은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빠른 의사결정과 고유기술을 응용해 시장 변화에 스스로 발맞춰 새로운 제품을 창출하는 선구자 정신으로 혁신을 이끌고 있다. 위험을 감수하는 과감한 모험으로 도전하여 실패해도 이를 용인함으로써 결국 기존 제품시장을 창조적 파괴가 가져오는 새로운 시장으로 열어간다. 제품의 세대교체는 지속적 혁신의 산물이나 끊임없이 혁신을 찾는 와중에도 전통과 원칙은 지킨다.

이탈리아 가족기업은 선대가 후대에게 깨우치는 학습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엄격하고 철저하며, 회사의 업무를 단계별로 가르치고 수용할 능력이 있는지 시차를 두고 검증한다. 대를 이어오는 가훈, 가족헌장, 사훈, 철학과 원칙 등에서 묻어나는 선대의 숨결, 개척자 정신을 느끼며, 사회적 책임, 도덕적 의무를 실천하는 자세를 가다듬는다. 기업을 소유하나 사회의 공기(公器)로 여기며, 전문경영인 못잖은 능력을 겸비한 훌륭한 후계자를 가족에서 찾고 양성해 이어달리기에서 배턴을 넘겨주듯 아버지에서 아들, 그리고 손자에게 물 흐르는 듯 부드러운 승계로 가업을 이어간다.

이탈리아 장수기업은 계층화된 수직적 조직구도가 아닌 수평적 분업구도를 형성함으로써 불필요한 경쟁을 배제하고 각자의 위치에서 전문성 연마에 주력한다. 기업브랜드를 글로벌화함으로써 최고급 제품을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일관성 있게 공급해 전문화를 이룬다. 우리나라 전체 제조업체의 85%를 차지하는 가족기업이 이탈리아 장수기업의 비결을 한 번쯤 돌이켜 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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