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의 마지막날,
충남 예산으로 떠나다

금오산 자락에서 굽어본 향천사 경내

[중소기업투데이 박철의 기자] 

“버려야 채울 수 있다”

지난 10월31일 시월의 마지막 날, 여의도에서 자동차로 2시간30분 가량 달려 충남 예산의 향천사(香泉寺)로 향했다. ‘시월의 마지막 밤’ 대신, 단풍구경 가는 날로 정했다.

향천사 입구 주차장에서 절 앞마당까지는 걸어서 10분이면 도달할 수 있는 짧은 거리다. 향천사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울긋불긋한 단풍이 일행을 맞았지만 아직은 시기적으로 조금 이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지친 일행들에겐 수다를 떨면서 외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안이 되고도 남을 터. 거기에 가을바람과 미세먼지 없는 파란 하늘, 그리고 낙엽이 형형색색으로 물들어가는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행운이었다. 하나 더, 우주의 질서에 순응하는 자연의 모습은 우리를 작게 하고 겸손하게 한다.

나무는 가을이면 낙엽을 떨구며 여지없이 겨울나기를 준비한다. 겨울에는 일조량이 적어지고 날씨가 건조해지면서 물이 부족해 영양분을 공급받기 어렵기 때문에 생존을 위한 아픈 선택이다.

특히 활엽수는 어김없이 단풍을 만들어 몸을 가볍게 한 뒤 하늘에 자신을 맡긴다. 하늘을 나는 새가 뼛속을 비워야 먼 여행을 떠날 수 있듯이...

향천사 은행나무는 유난히 샛노란 빛을 띠고 있었다.

우주와 자연의 질서를 다시 한 번 깨우치게 하는 단풍여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단풍이 땅에 떨어지면 낙엽이 된다. 향기 품은 낙엽은 거름이 되고 바람에 떨어지는 씨앗을 보호, 새로운 생명을 잉태시키는데 힘을 보탠다. 이게 자연의 순환이자 우주의 명령이다.

향천사 좌우 계곡을 따라 일렬로 도열한 은행나무는 마치 산사를 지키는 수호신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단풍의 절정은 일주일 가량 지나면 제대로 즐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과유불급이라고 하지 않던가! 세상사 넘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조금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더욱 아름다울 수도 있지 않을까.

향천사는 백제 의자왕 10년(650년)에 의각스님이 세웠다. 의각스님이 중국에서 만든 부처를 돌배에 싣고 오산현 불포해안(신암면 창소리)에 도착한 다음에 절터를 마련하려고 배에서 한 달 동안 정성으로 예불을 올리던 어느 날, 황금까마귀 한 쌍이 날아와 배 주변을 돌고 사라졌다고 한다. 그 뒤를 밟아보니 현 향천사 자리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는데 기이하게 여겨 주위를 살펴보니 향내음이 가득했다. 이렇게 해서 산 이름이 금오산으로, 절은 향천사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소나무숲이 병풍처럼 둘러싼 향천사 불당

일주문을 지나 산책길과 절로 들어가는 길목에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붉은 동백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극락전으로 가는 담벼락을 따라 조성된 화단에는 상사화 줄기가 푸릇푸릇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꽃이 필 때 잎은 없고 잎이 자랄 때는 꽃이 피지 않으므로 서로 볼 수 없다 하여 상사화라는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요즘 ‘바람에 날리는 저 꽃 잎 속에 내 사랑도 진다’라는 가사의 ‘상사화’가 상종가를 치고 있다. 향천사 곳곳에 관상용으로 심어진 대나무 오죽(烏竹)과 피라칸사스 열매도 가을 풍경을 진하게 거들고 있다.

건축한지 불과 3~4년에 불과한 약사여래상이 눈에 띈다. ‘모든 중생의 질병을 치료하고 재앙을 소멸시키며, 부처의 원만행(圓滿行)을 닦는 이로 하여금 무상보리(無上菩提)의 묘과(妙果)를 증득하게 하는 부처’라고 한다.

약사여래상 앞을 지나 5분 정도 걸어가면 충남문화재자료 173인 천불전에 도착한다. 천불전은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 규모의 건물로 의각이 옥돌로 조성한 높이 15㎝ 정도의 소불이 저마다 다른 모양으로 안치되어 있다. 보조국사 지눌이 당나라에서 가져와 안치했던 3053기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의미하는 불상 가운데 1516불만이 이곳에 남아 있다.

붉은 동백이 멀리서 온 객(客)을 초입에서 맞아주었다.

낙엽이 꽃이 되다

향천사를 감싸안고 있는 금오산 자락을 올랐다. 아늑하게 띠를 두른 모습의 소나무 군락지는 소나무를 좋아하는 사진작가들에게 명당으로 손색이 없어 보였다.

소나무는 한번 베고 나면 다시 움이 나지 않는 특징이 있다. 구차한 삶을 거부한다는 말이다.

소나무는 바위를 품고, 바위는 소나무를 품는다고 했다. 그래서 역경의 상징으로 통한다.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가 바로 소나무라고 한다.

수령이 50년은 돼 보이는 소나무와 참나무 한그루가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다. 소나무 곁에 기와 한 장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아마 수목장을 한 뒤 누군가가 흔적을 남겨놓은 모양이다. 기와장 앞에 잎이 유난히 푸른 참나무가 보였다. 하여, 곡진 삶을 살다가 생을 마감한 한 영혼이 참나무로 환생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향천사 계곡의 물은 말라버리고 올 여름 폭우가 할퀴고간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아쉬웠다.

소나무 아래서 영면에 든 이름모를 이의 흔적  

하산하는 도중에 스님을 만났다. 집나간 아내가 금오산으로 들어갔다는 소문을 듣고 찾으러 왔다는 말에 스님은 “며칠 전 계곡에서 한 여인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고 응수한다. 농담을 재치있게 받아주고 떠나는 스님의 뒤태가 여유롭게 느껴졌다.

향천사 계곡을 따라 주차장까지 내려오는 길은 은행나무를 비롯해 수많은 단풍나무들이 지천에 널려 있었다. 시월의 마지막 날, 겨울의 문턱에서 욕심을 버리고 다음 생(生)을 기약하는 일종의 의식 같은 느낌이다.

일행 중 K조합 전무는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 낙엽은 날개 소리와 여자의 옷자락 소리를 낸다”는 레미 드 구르몽의 시 <낙엽>을 읊으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그는 이어 “가을에 떨어진 낙엽이야말로 마음의 꽃이다”며 “특히 동백꽃이 뒹구는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고 했다. 그렇다. 낙엽은 꽃이며, 내일의 희망을 지피는 사랑의 불씨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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