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사무국장

이종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사무국장
이종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 사무국장

“지속가능금융 정책은 21세기 현상이다.”(Sustainable finance policy is a 21st century phenomenon) 책임투자원칙(이하 PRI)이 발간한 한 백서(Taking Stock : Sustainable finance policy engagement and policy influence)에 담긴 문구다.

보고서에 따르면, 경제 규모 상위 50개국 중 48개국이 투자자가 지속가능성 위험과 기회 혹은 성과를 고려할 수 있도록 설계된 정책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지속가능금융을 지원, 장려, 또는 고려하도록 요구하는 약 500개의 정책도구에 걸쳐 730건 이상의 법(경성법, 연성법)이나 정책 개정과 개발이 있었는데, 97%가 2000년 이후에 이루어졌다.

PRI는 이 지속가능금융과 관련한 법과 정책들은 세 가지로 유형화 하는데, 연기금의 ESG 고려,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기업의 ESG 정보공개다. 지속가능금융 활성화에 이 세 가지는 필요조건이며, ESG는 핵심이다. ESG는 사회책임투자자가 투자의사 결정시 고려하는 기업의 비재무적인 요소인 환경(Environment),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ment)를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지속가능금융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언론에서는 매일 ESG에 대한 기사가 올라온다. 국제적으로 지속가능금융이 주류로 부상하고, 이 흐름에서 우리나라 금융과 기업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이 작용한 때문이다. 특히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2018.7)과 책임투자 활성화 방안 발표(2019.11)로 자본시장은 물론 사회적 관심도 높아진 상태다.

그러나 ESG에 대한 관심이 곧 지속가능금융 활성화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법과 정책 인프라가 반드시 구축되어야만 한다. 이 시점에서 PRI가 유형화 하고 있는 지속가능금융 활성화를 위한 세 가지 중 어떤 정책이 현재 미흡하고 부재한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2016년 12월에 도입했다. 비록 자율이지만, 국민연금이 주식과 채권 자산에 대하여 ESG를 고려할 수 있도록 하는 근거법도 국민연금법 개정으로 2015년에 마련했다. 향후 전체 연기금이 ESG를 의무 고려하도록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그러나 기업의 ESG 정보공개는 여전히 답보상태다. 물론 자산규모 2조 이상 상장기업의 경우 ‘기업 지배구조 보고서’ 제출을 의무화 하고는 있다. 하지만 투자자들이 자주 보는 주류 보고서인 ‘사업보고서’와는 별도의 보고서다. ESG 정보를 사업보고서에 공시하도록 하려면 ‘자본시장법’을 개정해야만 한다.

자본시장법은 증권거래법, 선물거래법, 간접투자자산운용업법 등 6개 법을 폐지·통합하여 2007년 제정하여 2009년 2월 시행된 법률이다. 필자가 의안정보시스템을 통하여 분석한 결과, 자본시장법이 시행된 2009년부터 현재까지 비재무정보 영역에 속하는 다양한 사항 중 단 한 가지라도 공시를 의무화 한 개정안 발의는 총 22건이다. 2009년 3월 민노당 이정희 의원의 ‘임원별 보수 공시 의무화’ 개정안을 시작으로 18대 국회 2건, 19대 7건, 20대 12건, 21대에서는 현재 1건이 발의되었다.

개정안의 다수는 임원의 보수와 관련한 사항으로, 10년 사이에 공시 확대라는 성과를 이끌어 냈다. 기업의 임원 보수 총액만의 공시는 2014년에 5억원 이상 등기임원의 개인별 보수와 구체적인 산정기준 공시로, 2018년에 보수 총액 5억원 이상인 상위 5인 임직원(비등기임원 포함)의 개인별 보수 내역 공시로, 그리고 2019년에는 비등기임원의 평균 보수 공시 의무화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개별 사안이 아닌 ESG 전반에 관한 정보공시 의무화를 골자로 한 자본시장법 개정은 단 일보(一步)의 진전도 없는 실정이다. 18대 국회인 2010년 7월, 박선숙 의원의 최초 개정안 발의를 시작으로, 19대 2건(홍일표, 이언주 의원), 20대 3건(홍일표, 이언주, 유동수 의원)이 제출되었으나 번번히 무산되었다. 참고로, 지난 20대 국회에서의 유동수 의원안은 사업보고서상 ESG 공시 의무화가 아닌, ESG 정보를 담고 있는 지속가능성보고서 발간 의무화와 위반시 처벌 규정을 담고 있다. 현 21대 국회에서는 민형배 의원안 1건이 발의된 상태다.

사실, 20대 국회에서 ESG 공시에 대한 최소한의 ‘법적 근거’를 마련할 기회가 있었다. 홍일표, 이언주, 민병두 의원안을 병합심사한 결과, 정무위원회 대안으로 소관 상임위를 통과한 바 있기 때문이다. ‘사업보고서 제출대상법인이 사업보고서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관한 사항으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사항을 기재할 수 있다’라는 조항만 신설한 대안이었다. 지배구조, 인권, 노동, 기후변화 등 환경, 반부패, 안전, 소비자, 공정거래 관행, 지역사회 참여와 발전 등 ESG의 주요 이슈가 명시된 의무공시를 요구한 입장에서 이 대안은 실망스러운 내용이었다. 자율공시는 법률의 실효성 확보에 십중팔구 실패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법적 근거’ 마련이라는 측면에서 반보전진(半步前進)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부드러운 이 대안마저도 법사위의 벽을 넘지 못했다. ‘기업부담’과 ‘시기상조’는 ESG 정보공개 의무화를 막아 온 기업과 보수적인 정치인의 상투적 레퍼토리(repertory)다. 기업의 ESG 전반에 관한 정보공시 의무화는 10년 이상 무산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사이, 유렵연합(EU)는 회계연도 평균 근로자 수 500인 이상, 자산총액 2,000만 유로 또는 순매출 4,000만 유로 이상의 기업이나 공익법인에 대해서 2014년에 ESG 공시를 의무화했고, 2018년 이를 적용한 최초의 보고를 하도록 하였다. ‘비재무정보 의무공시제도’(EU Directive on Non-financial and Diversity Information)다. 금융안정위원회(FSB)는 기후변화가 글로벌 금융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는 심각한 우려를 반영하여 ‘기후 관련 재무정보 공개 태스크 포스’(TCFD : Task Force for Climate-Related Financial Disclosure)를 발족하여, 기업 재무보고서에 기후변화 정보공개를 핵심으로 한 권고안을 2017년에 발표하기도 했다. 이 권고안은 EU에서는 의무로 적용된다. 비재무정보 의무공시제도에 반영했기 때문이다. TCFD는 향후 의무화 될 전망이지만, 글로벌 기업과 금융기관들은 TCFD가 요구하는 정보를 자발적으로 공개하고 있다. 특히 금융 투자자들의 글로벌 정보공개 이니셔티브인 CDP(舊 탄소정보공개프로젝트)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CDP가 TCFD의 요구사항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무관심과 기업 눈치보기로 법안을 뭉개버리는 동안, 유럽 등 선진국의 금융기관과 기업들은 ESG 경쟁력을 빠르게 축적해 나가고 있다.

기업의 ESG 정보공개 의무화는 지속가능금융의 기본 정책이다. 사회책임투자(SRI)와 스튜어드십 코드는 모두 ESG 정보를 토대로 실행되기 때문이다. 사회적 책임이 시대정신이 되고 있고, 이를 구현하기 위한 투명성 강화는 필수가 되었다. 이러한 국제적인 흐름을 고려할 때, 10년이 넘도록 ESG 정보공시 의무화 법이 마련되지 않았다는 점은 우리나라의 경제 위상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부끄러운 일이다.

정부와 국회는 기후금융, 녹색금융, 더 나아가 지속가능금융 활성화를 공언하면서도, 왜 기본인 ESG 정보공개 의무화는 추진하지 않는가. ESG 워싱(ESG Washing)과 다를 바 없다. ‘기업부담’ ‘시기상조’라는 레코드판에 더 이상 휘돌리지 말아야 한다. 지겨울뿐더러 시대가 변했기 때문이다. 논어(論語)에 본립도생(本立道生)이라고 했다. 근본이 바로 서야 도(道)가 생긴다는 말이다. 부디 21대 국회에서는 ESG 정보공개 의무화를 골자로 한 자본시장법 개정이 반드시 이루어져 지길 바란다. 그리하여 ESG 정책의 기본이 확고히 구축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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