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태환의 인문학 칼럼] 우레와 같은 침묵
[하태환의 인문학 칼럼] 우레와 같은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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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투데이 하태환 논설위원
중소기업투데이 하태환 논설위원

불교의 큰 가르침 중에 불립문자(不立文字) ,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 염화미소, 이심전심이 있다. 세상의 이치를 마음으로 파악하고 문자나 언어로 고정시키지 말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또 선종과 교종, 소승불교와 대승불교가 갈리는 지점이 될 수 있다. 한편에서는 부처의 가르침과 정신을 그 유동적이고 활기찬 상태로 깨닫고 유지하는데 매순간 정진하고 전력을 기울이라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을 매 상황에 따라 적용하기가 어려우니 최소한의 제도화로 고정시켜 따르라 한다. 그러니까 법의 정신과 구체적 법 조항과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또 모든 제도의 정신, 제도화에 따른 고착과 비교될 수 있다. 먹고 살기 바쁜 일반인이 상황마다 성현의 좋은 정신을 살려 판단하고 행동하기는 쉽지가 않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살계를 범하는 것이 오히려 더 극악한 살생을 막아주기 때문에, 살생 자체가 자비가 될 수 있다. 상황이 복잡하고, 또 개인마다 그 기준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측은지심은 살생하지 말라라는 문자로 제도화 되었다. 어떤 정신의 제도화라는 점에서, 종교나 도덕, 법은 모두 동일하다. 어떤 정신이 책으로 씌어진 순간, 그것은 이미 죽은 것이라는 말이 있다.

추상적으로 우리의 생활을 규율하고 있는 것들을 원래의 정신과 취지를 살려 지킬 수만 있다면 우리 생활에 모순과 갈등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도덕적 삶을 살며, 법 생활에 융통성을 발휘할 수만 있다면, 고리타분한 교조주의자의 멍애도 벗고 정신적인 자유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선의가 있으면 꼭 그것을 이용하고 사기를 치고자 하는 자들이 있다. 즉 백옥처럼 선하고 자유로운 인간 정신을 구속하고 속박하여 정신적 노예로 만들어서, 문자화된 어떤 주의의 신봉자로 만들어버린다. 교조주의자란 어떤 규정이 생성된 근본 정신은 무시하고, 수천년 내지 수백년 전의 상황에서 만들어진 문자와 제도를 오늘에 그대로 적용하려고 하려고 하는 자들을 말한다. 실제로 종교, 도덕, 법을 훼손하는 자들은 겉으로는 그 원칙을 지킨다고 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강압하는 원조 교조주의자들이다. 어떤 종교를 지키겠다는 테러는 모두 그 종교의 정신에 반한 것으로, 직접 그 종교의 심장을 겨냥한 것들이고, 무작정의 율법주의 역시 그 법의 정신을 저해하는 테러이다.

불립문자 같은 제도화의 경계는 선(禪)사상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에서도,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정신과 가르침을 위해 교리와 종단에 얽매이지 말 것을 경계하는 묵시론적 교훈은 도처에 존재한다. 아예 이 종교의 본질 자체가 그러한 종교화에 대한 거부이다. 우선 신 자신, 또는 신의 아들인 예수는 탄생부터 제도화에 대한 반제도화이다. 그는 신이면서 인간으로, 그것도 말 못하는 가축처럼 마굿간에서 태어난다. 제도화된 우리의 눈에는 사실 사람대접 받기 힘들 것이다. 그의 신분은 계급 사회에서 가장 하층의 천민으로 제도적 열외자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상징은 그 신이 인간이 만든 제도인 사회를 어지럽히는 자로서 국가 권력에 의해 처형된다는 사실이다. 신은 억눌린 인간을 해방하기 위해 가장 낮은 계급으로 내려왔고, 제도라는 틀 속에서 억압받았으며 그 제도 때문에 스스로를 희생한다.

이렇게 기독교는 그 본래 정신이 억압적 제도로부터 인간의 해방이었다. 그렇기에 그 정신을 신을 죽이는 제도로 제도화하는 순간 신의 정신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그래서 기독교는 언제나 모순의 종교이다. 즉 자기 자신을 죽이면서만 만들어지는 역설적인 종교로서, 예수의 죽음이 그를 형상화한다. 인간의 몸을 하고 내려온 신이 인간에 의해 죽임을 당하여야 신은 해방자로서 완전한 신성을 갖게 되고, 부활하게 되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기독교가 탄생하고, 아울러 그러한 제도화 속에서 다시 신의 죽음을 맞는다. 기독교는 제도로서 신의 죽음의 책임자이고, 또 그래야만 종교로 탄생하게 되니, 끝없이 신의 부재를 한탄해야 하고, 신의 부재와 동시에 부활을 찬양해야 한다. 기독교는 종교로서 영원히 제도화를 피할 수 없고, 동시에 스스로를 부정하는 양날의 칼을 쥐게 된다. 실제 로마 카톨릭으로 제도화되고 바이블로 문자화하면서 기독교 정신은 죽음을 맞았다. 즉 기독교 정신, 자유와 해방의 신은 세속적 권력으로 대체된다. 기독교의 기묘한 모순이고, 그럼으로 해서 기독교는 자신의 융성과 쇠퇴를 동시에 담고 있다. 태생부터 자신의 부정을 품고 있다. 그래서 완전하다. 불교에서 말하는 ‘우레와 같은 침묵’과 동일하다.

성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인간으로서 최고의 가치를 추구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문자나 규정으로 제도화한 것을 교조적으로 따르는 것은 오히려 따르지 아니함만 못하다. 그것은 인간의 탐욕과 악에게 굴복하고, 성현의 지혜와 신적인 선함을 지우는 우매함 속에 갇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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