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 경영’이 유행인가 했더니, 요즘에는 ‘기업밸류업’이 회자되고 있다. 애초 지속가능하도록 기업 경영을 잘해보라는 뜻에서 하는 말이다. 유한양행의 회장직 신설 논란도 계기가 된 듯하나, 그것 말고도 배경은 여러 가지다. 그러나 그 본딧말을 액면 그대로 지키는 기업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아설까.시간이 지날수록 환경이니 사회니 하는 피곤한 담론보단, ‘우리 회사 ESG평가가 몇 등급이냐’며 잿밥에 더 신경쓰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이 정도면 약과다. 대기업 중엔 아예 세상의 눈치따윈 아랑곳 않는 곳도 많다. 변칙적 기업 상
현대는 공인된 전문가들의 판단이 우월하다는 믿음이 지배한다. 특히 과학기술 분야에선 그렇다. 과학자의 ‘자기통치(self-government)’라는 말이 나올 만큼, 그들만의 견고한 울타리가 대중에게 통용된다. 디지털 기술만능의 불평등 사회를 예감하는 지금, 그런 기류가 노골화되면서 ‘과학기술’과 ‘민주주의’는 서로 어울리기 힘든 검색어가 되고 있다. ‘플랫폼 제국주의’만 해도 그렇다. 네트워크 참여자들에 대한 애그리게이터의 수탈적 구도, 기술장벽에 가로막힌 다수의 낙오자를 걱정하는 소리도 많다. 결국 문제는 과학기술의 배분적 가치
이번에는 존 케리 미국 기후 특사가 중국에 갔다. 블링컨 미 국무장관에 이어, 재닛 옐런 재무장관이 중국에 갔다가 돌아온지 며칠 만의 일이다. 이처럼 워싱턴 최고위 관계자들이 마치 지금 아니면 안될 것처럼 줄줄이 베이징을 찾은게 벌써 두어달 전부터다. 문제는 가서 내뱉는 워딩 하나하나가 너무나 유화적이란 점이다. 그냥 유화적인게 아니라, “둘이 함께 세계를 경영해보자” 정도로 오해될 만큼, 36.5℃의 훈훈함이 느껴진다.옐런 장관은 대놓고 ‘디커플링’을 지적했다. “양국에 재앙이 될 것이며, 세계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실행할 수도
제로섬 법칙이나 죄수의 딜레마, 게임이론 등은 국제관계의 교범이다. 국가 지도자 간의 러브샷 너머로도 날카로운 암수가 오가기 마련이다. 최근 한국 외교행태가 그러하듯, 샅바싸움은 커녕 타국이 ‘학수 고대하는 해법’에 말려드는 건 금물이다. 그게 외교의 정석이다.전기차와 반도체를 둘러싼 한·미 간 ‘갈등’의 서사도 마찬가지다. 국제정치 원론에 충실할 때만 그 해법이 나온다. 우리로선 미국의 처사가 서운하고 괘씸하지만, 그들은 게임이론에 충실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마찬가지다. 그에 버금가는, 차가운 육도삼략의 비법과 전술을 구사
모였다 하면 요즘 ‘챗GPT’가 화제다. ‘AI’란걸 귓결로만 들어봤던 장삼이사들도 즐겨 입에 올릴 정도다. 좀 과장된 세태이겠거니 싶지만, 그 기술적 모티브를 알고보면 그렇게만 볼 수도 없는 일이다. 초대형AI로 개발한 GPT-3를 내장한 ‘챗GPT’는 한 마디로 인공지능 너머 인간지능을 넘본 것이다. 인간과 흡사한 텍스트를 만들어낸다고 해서가 아니다. 인간세상의 작동 기술, 곧 ‘생성’(Generative)의 기원을 ‘임베디드’하고 있어서 하는 말이다.서양문명에서 특히 두드러지지만, 20세기 들어 생성은 존재보다 현격한 우위에
이럴 수도 있구나 싶다. 한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이 권력의 눈 밖에 난 바람에 해당 방송국 자체가 존폐의 위기에 몰렸다. 지방의회가 해당 방송국의 지원 예산을 아예 없애기로 한 것이다. 해당 프로그램이 ‘편파적’이란게 이유라곤 하나, 진영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는 평판 따윈 아랑곳 않는다. 그 보다 한 달 전엔 ‘날리면 or 바이든’ 시비를 이유로 특정 방송 취재진의 순방외교 전용기 탑승이 거부되기도 했다. 국가 정상의 외교 동선 취재에서 특정 언론이 배제된 것이다.평소 영상이나 보도를 통해 눈치없이 집권 세력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
정말로 큰일났다. 한국에서 만든 전기자동차는 앞으로 미국 땅에 발도 못붙이게 생겼다. 소위 ‘인플레 감축법’ 탓이다. 북미에서 최종 조립된 전기차에만 1000만원의 보조금을 준다면, 누가 한국차를 살 것인가. 최악의 경우 연간 10만 여대의 차를 미국에서 팔지못할 수도 있다.배터리도 같은 처지다. 중국산 재료가 들어가거나, 미국과 FTA를 체결한 나라의 원료가 아니면 미국 시장에서 퇴출된다. 미국 시장뿐 아니다. 이게 나비효과의 빌미가 되어, 유럽과 다른 지역에서도 한국산 전기차가 급격히 위상이 떨어질까 두렵다. 그야말로 국가적 재
“당신이 14일 내내 하루 13시간씩 일하실래요?”근로기준법 개정안을 제시한 노동 당국에 묻는 말이다. 현행 ‘1주 12시간’인 연장근로 한도를 ‘월 단위’로 바꿔, 최악의 경우 2주 연속 ‘최대 주 92시간’ 일할 수 있다는 계산도 나오길래 하는 말이다. ‘11시간 연속휴식’의 보완체계가 만들어진들, 크게 달라질 건 없다. 일단 “공식 입장이 아니다”는 말로 얼버무려졌으나 두고 볼 일이다. 설마 하니 인간 세상에서 그런 법이 실제로 만들어지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그러나 이는 얼마나 더 일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3차산업혁명 이
▲이무희 씨 별세, 박경만 한서대 교수(전 서울신문·국민일보·문화일보 기자) 모친상= 6일. 부산 사상구 좋은삼선병원 장례식장 6호실. 발인 9일 오전 9시30분. 연락처 051-310-9292
삼성전자가 새로 짓기로 한 미국 텍사스주 비메모리반도체 공장은 그 함의가 예사롭지 않다. 삼성은 보도자료를 통해 “기존 오스틴 생산라인과의 시너지를 도모하고, 반도체 생태계와 인프라 공급 안정성을 기한다”고 했다. 허나 그건 어디까지나 보도자료일 뿐이다. 그 여백에는 국제 반도체 전쟁의 ‘소리없는 포성’이 메아리친다. 그렇다. 지금은 총만 안들었을 뿐, 반도체라는 ‘쌀포대’를 누가 많이 차지하느냐, 그래서 디지털혁명을 누가 선점하느냐를 둔 경쟁 아닌 전쟁이 한창이다.가장 가열차게 전장의 깃발을 치켜세운 건 역시 미국이다. 엔비디아나
‘위드 코로나’가 회자되는 요즘이다. 그렇다면 다시 ‘코로나’ 이전(Pre)으로 돌아갈 것인가. 그건 아마도 새로운 시대적 코드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새롭게 기획되어야 할 ‘포스트(Post) 코로나’의 삶을 겨냥한 온갖 담론과 사변들이 넘쳐나는 현실이다. ‘포스트 코로나’에 걸맞은 ‘포스트 자본주의’가 이야기되는가 하면, 마침내는 수구적 자본주의 교의를 뛰어넘는 탈근대적 ‘계몽자본주의’까지 호출당하고 있다. 이는 새삼 “왜 디지털혁명인가?”라는 원초적 질문과도 겹친다. 코로나 이전과는 다른, ‘포스트 코로나’가 포용할만한
살다 보니 별 일이 다 있다. 옛적 코흘리개들의 딱지치기나 뽑기, ‘무궁화꽃’ 술래 놀이, 오징어게임 따위가 세계적인 히트 상품이 되고 있다. 이걸 소재로 한 드라마 ‘오징어게임’이 넷플릭스가 방영하는 83개국에서 스트리밍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지구촌이 온통 그 ‘재미’에 흠뻑 빠져있다. 가히 ‘오징어게임’ 신드럼이라고 할 만하다. ‘오징어게임’은 456억 원의 상금이 걸린 서바이벌에 참가한 사람들이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 목숨을 걸고 극한의 게임에 도전한다는 내용이다.모두 9화로 구성된 줄거리는 일찍이 국내 평단이 그랬듯이,
‘코로나 19’로 온 인류가 전대미문의 폐쇄공포와 단절에 시달리는 이 즈음, 까뮈의 소설 는 마치 오늘의 현실을 복사한 듯한 작품이다. 팬데믹 세상에 대한 표피적 관찰을 뛰어넘어 공포와 기만, 체념, 이타적 이성과 자기애의 패러독스가 교차하는 극한의 인간 본성을 족집게 마냥 묘사해낸 소설이다. 역시 희대의 문호답다고 할까. 소설은 사람과 세상에 대한 까뮈의 탁월한 독해능력이 가감없이 빛나는 명작이라고 해야겠다.소설에서 작가 까뮈는 ‘페스트’라는 치명적 변수 앞에서 과연 인간조건은 어떻게 변용되어 작동하는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디지털혁명이 만개할수록 불평등의 패러독스에 대한 가설과 담론 또한 만발하고 있다. 대체로 보아 운과 타고난 재능, 의지와 본성이 교차하는 인간세상에서 평균적 개념의 절대 평등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는게 장삼이사의 상식이다. 아예 밀턴 프리드먼은 평등보단 차등, 공평보단 불공평에 방점을 찍었다. 그는 일찍이 ‘불공평과 불평등의 정의’를 콘텐츠로 한 ‘선택할 자유’(Free to Choose)를 책으로 펴내며 시장이 스스로 최적의 균형을 찾아갈 자유를 예찬했다. 대신에 국가의 수요 관리를 질타하면서, 통화에 대한 최소한의 통제와 자유로
[중소기업투데이 이상영 기자] 주문과 배달을 전문으로 하는 인공지능 로봇이 본격적으로 소매 현장이나 매장에 확산되고 있다. 최근 편의점 GS25가 이 분야에서 가장 앞서 가면서 AI로봇의 대중화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GS25는 지난해 말 강서구 LG사이언스파크에 있는 자사 점포에 업계 최초로 실내 배달 로봇을 배치, 실용화한 바 있다. 뒤를 이어 지난 5월에는 역삼동 소재의 GS타워에 위치한 GS25 점포에도 설치했고, 연말까지 고층 오피스 빌딩·병원·오피스텔 내 GS25 점포로 이를 빠르게 확산시켜 간다는 계획이다.배달 로봇은
[중소기업투데이 박경만 편집위원] 4차산업혁명기엔 자칫 공동체 구성원의 소외와 격차가 더욱 심각해질 수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쓰디쓴 독백처럼, “고효율 자본주의라는 엔진이 만들어내는 쓰레기더미, 즉 빈곤과 빈곤한 사람들”을 양산할 수도 있다. 그런 맥락이라면 4차산업혁명은 ‘혁명’이라기보단, 인간 소외와 차별을 극대화하는 역사의 반동이 되기 쉽다. 그래서 등장한게 경쟁지상주의에 맞선 평등 지향의 대안들이다. 즉 보편적 분배, 비대칭 복지, 기본소득과 같은 것들이다. 이는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교조적 사회주의와도 다르
‘공정’(fair)이라는 개념은 매우 논쟁적이고 주관적이다. ‘공정’의 다원적 규명을 시도하는 마이클 샐던이나, ‘능력주의’(meritocracy)를 비판하며 ‘인간 조건 자체가 운(運)’이라는 사회학자 마이클 영에 이르면 더욱 난해해진다. 이에 ‘경제’ 개념을 더한 ‘공정경제’로 확장할 경우엔 그 이념적 해석과 위상을 두고 새롭게 논란이 이어진다. 그러나 공정경제는 단순히 이념적이거나, 당위론적 진술을 넘어, 헌법적 가치의 기속력(羈束力. binding power)을 대동한 개념이다. 이른바 ‘경제민주화’ 규정으로 알려진 헌법 1
‘하이퍼텍스트’에 도전하라발빠른 중소기업들은 디지털 전환을 서두르고 있다. ‘포스트 코로나’의 국면에서 더 이상 아날로그의 추억만으론 생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자본과 인력이 딸리더라도 조금만 관심을 두면 방법은 많다. 바우처 형식의 정책 지원도 많고, 구독 형태의 클라우드 그룹웨어 서비스도 많이 소개되고 있다. 이제 디지털 전환은 단순히 패러다임 시프트의 문제만은 아니다.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며 살 것인가 하는, 시대적 사유를 새롭게 구축하는 것이다.그래서다. ‘굳이 무슨 디지털화냐’라고 혹여 반문한다면, ‘하이퍼텍스트’의
온라인플랫폼법을 두고 말이 많다. 자영업자나 소상공인에 대한 배달 플랫폼 사업자의 부당행위나 불공정거래를 강력 규제하자는게 법의 취지다. 그렇다보니 ‘배민’과 같은 사업자 이익을 대변하는 측의 반발도 만만찮다. 아직 입법예고 단계이고 논란도 현재진행형이어서, 그 결과는 두고 볼 일이다. 다만 온라인플랫폼 역시 플랫폼을 공유하고 서비스를 교환, 대차함으로써 생산·유통의 한계비용을 제로 수준으로 낮춘다는 점에서 공유경제의 아류로 봐도 틀리지 않다.공유에 바탕한 공유경제의 원론적 개념은 선(善)하기 짝이 없다. 살벌한 ‘시장’이 아닌 ‘
[중소기업투데이 박경만 편집위원] 지난해던가. 문화체육부의 한 설문조사에선 응답자의 3분의 2가 “삶의 가치를 성찰하게 하는 ‘인문’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대답했다. 반가운 일이었다. 무릇 경제․사회를 구동하는 배분적 평등과 공정한 질서 또한 그런 성찰이 있을 때 가능할 것 같아 그러했다. 걸핏하면 그런 질서를 훼손하는 이 땅의 현실에 견줘볼 때 그런 생각들이 더욱 반가웠다.기실 대․중소기업 간의 약탈적인 갑질과 차별, 독점, 고질적 시장 왜곡은 여전하고, 양극화와 빈부의 골은 더욱 깊어지는게 현실이다. ‘땅따먹기’ 식의 부